19일 서울 영등포구 디플러스 기아 사옥에서 ‘쇼메이커’ 허수를 만났다. 그와 올해 국내 리그를 치르며 느꼈던 감정들과 ‘LoL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지역 대표 선발전의 준비 과정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눠봤다.
죽어라 공부한 것들이 전혀 나오지 않은 시험지
허수는 올해 스프링과 서머 시즌을 “힘들었던 시즌”으로 총평했다. 그는 “스프링 시즌 개막 전에 연습이 잘 풀려서 시즌도 잘 풀릴 거라 생각했다. 막상 개막하니 여전히 강팀의 벽을 넘지 못했던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디플 기아가 오프시즌에 준비했던 ‘스노우볼 조합’이 메타와 어긋난 게 뼈아팠다. 그는 “우리 팀은 라이너들의 체급이 높아서 라인전부터 굴려서 이기는 연습을 개막 전부터 많이 했다. 실제로 시즌 초반에는 그런 플레이로 많이 이기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결국 강팀들 상대로는 그런 전략이 잘 통하지 않았다”고 지난 시즌을 곱씹었다.
올해 국내 리그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밸류’였다. 그리고 이 단어를 가장 잘 해석한 젠지가 두 차례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디플 기아는 밸류 조합과 친숙하지 않았다. 선수들의 성향도, 장점도 이와 멀었다. 이들은 마라톤 코스에 선 단거리 육상 선수였다.
“스프링 시즌을 아쉽게 끝마친 이후 우리는 눕는 조합, 후반 밸류 조합을 잘 소화하지 못한다고 자가 진단했다. 그래서 서머 시즌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후반 조합을 많이 연습했다. 마오카이에 원거리 딜러 2개를 끼는 조합이라든지….”
“특정 라인이 라인전에서 손해 보더라도 다른 라인에서 이득을 보는 식으로 챔피언 티어를 정리하고, 의견을 조율했다. 하지만 막상 대회 개막 후에는 경기에서 몇 번 지니까 정리했던 것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더라. 이런 것들을 바로잡는 게 어려웠다.”
디플 기아 선수단의 이름값을 고려하면 후반 밸류 싸움을 잘하지 못한다는 게 쉬이 믿기지 않는다. ‘캐니언’ 김건부, ‘데프트’ 김혁규 모두 후반 캐리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들이다. 문제는 선수 개인 기량이 아닌 교통정리에서 나왔다.
“선수마다 자아가 있다. 우리는 그걸 하나로 통합시키질 못했다. 사이드에서 잘리는 장면도 많이 나왔다. ‘A조합을 잘하려면 B선수를 잘 키워야 한다’ 등의 목표가 팀마다 있을 텐데, 우리 팀은 ‘칸나’ (김)창동이가 희생을 많이 했다. 나머지 팀원들은 ‘내가 자원을 먹어서 잘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한두 명씩 사이드에서 잘리거나 손해를 봤다.”
디플 기아는 스프링과 서머 시즌 모두 플레이오프에서도 부진해서 최종 결승 진출전으로 향하지 못했다. 스프링 시즌 땐 한화생명e스포츠에, 서머 시즌에는 T1에 져서 시즌을 조기 마감했다. 1부 승격 이후 쭉 이어온 ‘LoL 월드 챔피언십’ 진출 개근 기록도 끊길 위기에 놓였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후반 조합 연습 성과 빛 본 선발전
선발전에서 디플 기아는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자신들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겨졌던 DRX를 3대 0으로 잡아내고, 한화생명과의 4시드 결정전에서도 3대 1로 이겼다. 플레이오프에서 조기 탈락한 뒤 팀의 문제점, 상대인 한화생명의 장단점 등을 냉철하게 분석한 성과가 나왔다.
“플레이오프도 1라운드에서 탈락하고 선발전도 2라운드부터 시작해서 올해는 유독 선발전 준비 기간이 길었다. 덕분에 다양한 챔피언을 연습해볼 수 있었다. 깜짝 카드로 한두 세트를 이길지언정 결국 다전제는 후반 조합 숙련도에서 승패가 갈린다고 생각한다. 특히 남은 코인이 없는 선발전에선 서로 긴장해서 실수가 연이어 나오기 마련이다. 후반 조합을 연습하고, 그런 와중에 특히 미드와 원딜의 밸류가 부족하지 않게끔 밴픽을 준비했다.”
올해 선발전은 ‘1강·2중·1약’으로 평가됐다. 결승 문턱 바로 앞에서 고꾸라진 KT 롤스터가 1강, 플레이오프 막차를 탔던 DRX가 1약으로, 1년 내내 비슷한 성적을 내온 디플 기아와 한화생명이 2중이었다. 그런 만큼 양 팀은 월즈를 앞두고 외나무다리에서 대결하게 될 걸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분석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선발전을 앞두고 연습하면서 ‘잘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KT와 만난다면 힘든 경기를 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발전 첫날 결과에 따라 우리의 상대가 한화생명으로 결정되니까 ‘나만 잘하면 이기겠다’ 싶더라.”
“사실 DRX전은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우리가 많이 앞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붙어보니 우리가 티어 정리를 잘하고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한화생명과 KT의 경기를 보니까 한화생명 특유의 미드·원딜은 밸류 픽을 뽑고 탑이 희생하는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팀 컬러를 카운터 치기 위해서 밸류 싸움에서 밀리지 않게끔 조합을 짜고, 연습했다.”
허수는 선발전 최종전에 칼을 갈고 나왔다. 한화생명과의 4차례 경기에서 제라스(4킬 1데스 2어시스트), 사일러스(7킬 0데스 3어시스트), 아지르(6킬 1데스 9어시스트), 코르키(1킬 2데스 7어시스트) 등 세트마다 다른 챔피언을 꺼냈고, 상대를 몹시 괴롭혔다.
“제라스는 버프 이후 많이 연습해봤다. 아지르 상대로 괜찮아 보였다. 코르키는 연습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코치님들과 아지르 상대로 뭘 하는 게 좋을지 의논하다가 코르키가 밸류도 높고, 한화생명 상대로 좋은 점이 있다고 느껴져서 즉흥적으로 골랐다.”
3세트에서 고른 아지르는 그가 올해 가장 열심히 ‘깎아온’ 무기였다. 허수는 “아지르를 비선호하는 편이어서 정규 리그 중에는 기피하는 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앞으로의 패치 방향을 봐도, 혼자서 생각을 해봐도 아지르가 너무 좋아 보이더라. 언젠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은 아니어도 플레이오프 전까진 반드시 숙련도를 높이겠다고 다짐했었다”고 덧붙였다.
솔로 랭크에서는 일부러 아지르를 연습하지 않았다.
“내가 선호하지 않는다는 걸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만큼 우리와 상대하게 될 팀에서도 ‘쇼메이커는 여전히 아지르를 안 한다’고 짐작하게끔 했다. 하지만 스크림에서는 많이 연습했고, 아지르를 잘 다루는 선수들의 리플레이도 여러 번 관전했다. 나는 아지르를 할 때 모래 병사를 성급하게 소환하는 안 좋은 버릇이 있었다. 이걸 늘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고쳐나갔다.”
월즈 4시드 놓고 ‘제카’ 김건우와 외나무다리 승부
“‘제카’ 선수가 선호하는 챔피언들을 카운터 치기 위해 여러 가지 챔피언을 준비했다. 전부를 보여드리진 못했다. 이상한 챔피언들도 많이 연습했는데 ‘각’이 나오질 않더라. 앞선 플레이오프나 선발전을 보니까 아지르를 잡은 팀이 다 이겼다. 아지르를 상대로 할 챔피언을 잘 준비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날 두 미드라이너는 서로 물러섬 없이 진검승부를 펼쳤다. 백미는 2세트였다. 허수가 사일러스를 골랐고, 김건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칼리로 맞섰다. 사일러스 대 아칼리, 작년에 에드워드 게이밍(EDG) 상대로 김건우와 DRX의 ‘미라클 런’ 시작을 알렸던 매치업이다. 허수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한 뒤 김건우의 옥타곤으로 들어갔다.
“밴픽 2페이즈에서 미드 챔피언을 뽑아야 했는데, 미드 챔피언에 밴 카드가 많이 투자됐던 걸로 기억한다. 조합을 고려해서 챔피언을 뽑으려고 보니까 할 만한 게 딱히 없었다. 한화생명 상대로는 밸류 싸움에서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라인전이 다소 불리하더라도 사일러스를 뽑아야만 했다.”
“상대가 아칼리를 고를 건 예상했다. 하지만 거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원래 아칼리 대 사일러스 구도에 대해 내가 정리해놓은 데이터가 있는데, 너무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더라.(웃음) 선호하는 구도도 아니고…최대한 상황에 맞춰서 잘 플레이해보려 했다.”
기징 최근 세계 정상에 오른 두 한국인 미드라이너들임에도, 월즈 선발전 최종전의 무게는 그들의 손가락 끝을 평소보다 미세하게 떨리게 만들었다. 허수는 “나는 여전히 큰 무대에 서면 종종 첫 세트 때는 긴장하기도 한다”면서 “첫 세트를 마친 이후엔 마음이 편해진다”고 말했다.
“원래 아칼리 대 사일러스 구도는 초반이 정말 중요하고, 아칼리가 라인전에서 유리하다. 이때 아칼리의 Q스킬(오연투척검)을 맞히고 피하고는 심리전의 영역인데 ‘제카’ 선수가 그런 거를 정말 잘한다. 아칼리 스킨, 스킨을 만든 선수 아닌가. ‘제카’ 선수가 근접 구도 심리전에 정말 강하다.”
“그런데 선발전에선 내가 앞뒷무빙으로 Q스킬 사용을 유도하니까 거기에 당하더라.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세트스코어 0대 1로 밀리고 있었지만 밴픽만 수정하면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첫 라인전만 잘해보자는 생각으로 2세트에 임했는데 상대의 긴장이 전해지니까 그때부터 마음이 편해졌다.”
허수는 큰 경기일수록 심리전을 거는 타입이다. 그는 이날도 김건우에게 정글러의 갱킹을 놓고 이지선다 문제를 끊임없이 냈다. 허수는 “근처에 정글러가 없는데도 자꾸만 상대에게 갱킹이 왔다는 뉘앙스로 심리전을 걸었다. 상대가 의식하는 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허수가 올해 수십 번 고난과 마주하며 배운 것…‘티어정리’의 중요성
천신만고 끝에 월즈에 진출하긴 했지만, 디플 기아와 허수는 올해 여러 번 고난과 마주했다. 특히 허수로서는 미드 챔피언 티어 정리가 이토록 어려웠던 적이 없었다. 강자들과의 라인전도, 게임의 방향성 설정도 전보다 힘들거나 벅찼다.
“쉽지 않은 시즌이었다. 라인전도 잘되지 않았고, 게임하면서 방향성도 잘 잡지 못했다. 미드라이너 챔피언 티어 정리도 쉽지 않았다. 남들을 따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애니, 니코, 아지르, 제이스가 나왔을 때 티어 정리가 힘들었다.”
“애니는 나중에 사이드로 가면 썩는 챔피언이다. 파밍도 힘들어서 본대에 붙어야 한다. 라인전 센 걸 살려야 하는 챔피언인데 내가 잘 못 다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애니 티어가 워낙 높아서 애니 상대로 뭘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사실 티어 정리는 허수와 디플 기아가 스스로의 강점이라고 생각해온 영역이었다.
“우리 팀만의 티어 정리가 있었는데 다른 강팀은 우리와 정반대로 티어 정리를 한 거 같았다. ‘저게 맞나?’ 싶어서 그들의 경기를 봤는데 그들이 정리한 걸 바탕으로 이기더라. 그래서 그 팀의 밴픽을 따라 해봤더니 우린 잘 안 됐다. 그래서 대회에서 이기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내부적으로 정리한 티어에 혼란이 생길 때가 위기라고, 스스로 정리한 것에 대한 확신이 중요하다고 올해 느꼈다.”
“스크림에서도 티어 정리를 잘하는 게 중요하다. 실전에서 우리가 생각했던 티어에 맞춰서 챔피언을 잘 뽑았는데 졌다면 ‘이 챔피언은 별로 안 좋은 거 같다’고 느껴서 버리고 바로 다른 팀을 따라하는 게 아니라, 왜 졌는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가 설정했던 챔피언 티어를 하나하나를 다시 까봐야 했다. 올해는 그런 부분이 부족했다. 어떤 챔피언을 썼다가 지면 그 챔피언을 빠르게 버리고 다른 걸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방향성이 맞았는데도 졌다면 우리가 해놓은 티어 정리는 옳았을 수도 있다.”
허수는 “사실 한화생명과의 선발전 최종전 1세트도 우리가 설정한 밴픽 방향성에 맞게 플레이했는데 잘 안 풀린 게임이었다”면서 “만약 블루에서 싸우지 않고 천천히 했다면 이겼겠지만, 사실 초반에 정글러 오브젝트 스틸 없이 흐름이 그대로 흘러갔다면 이미 우리가 절대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고 복기했다.
“‘바론 먹고 천천히 라인부터 쓰고 포킹 먼저 했으면 이겼다’로 피드백이 끝나는 게 아니고 ‘초중반에 이대로 흘러가면 진다’를 느껴서 밴픽을 수정했다. 방향성에 맞게 플레이했는데 지는 것과 방향성대로 플레이해서 이기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만약 첫 세트 이후 ‘블루에서 한타 안 했으면 이겼으니까 밴픽은 문제없다’고 생각해서 제라스를 한 판 더 했다면 나는 2세트도 졌을 거라고 생각한다”면서 “앞으로 우리에겐 월즈가 남아있다. 거기서는 더 많이 조합의 완성도를 의심하고, 챔피언의 성능을 하나하나 다 까봐야 한다.”
목표는 월즈 우승…스위스 스테이지, 디플 기아에 호재
허수는 올해 스프링과 서머 시즌에 배우고 느낀 것을 토대로 기량을 더 갈고닦아 2023년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는 팀이 되겠다고 밝혔다. 그는 “평소보다 일찍 숙소로 복귀했다. 지난주부터 연습을 시작했다”면서 “월즈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위스 스테이지 방식이 우리 팀에 불리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들 라인전이 강한 만큼 월즈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거로 본다. 밴픽에 대해 깊게 고민해보겠다. 팬분들이 우리를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게 가장 높은 무대까지 올라가겠다. 목표? 우승이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