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서울 동작구의 한 무용 연습실로 들어서자 11명의 무용수들이 단장의 카운트에 맞춰 동작을 맞추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란히 손을 잡고 한 줄이 된 무용수들이 바람개비처럼 회전하며 꽃봉오리 모양을 만들었다가 꽃잎을 활짝 피우는 동작을 할 땐 22개의 발이 일사불란하게 무대를 휘저었다.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섬세한 손동작을 취할 땐 여느 무용단 연습 현장과는 사뭇 다른 구령이 들렸다. “성령님이 찾아와 안아준다는 느낌으로~ 왼쪽 바람~ 오른쪽 바람~ 사랑을 나눠주듯이. 날개~”
올해 창단한 지 만 10년이 된 룩스(LUX)빛 무용단(이하 룩스빛·단장 김자형)의 연습 현장이다. 김자형(53) 단장은 “느낄 수 있는 감각과 감정을 최대한 살려 동작을 표현하기 위해 안무 창작 이상으로 구령을 고민한다”고 설명했다. 단원들의 구성을 듣고 나니 그의 설명에 더 공감이 갔다.
룩스빛은 시각장애인 무용수 6인과 비장애인 무용수 6인으로 이뤄진 무용단이다. 비장애인 무용수에게처럼 “이렇게 해봐요”라며 동작을 보여줄 수 없다. “앞이 안 보이는 데 움직이면서 무용할 수 있느냐”는 편견을 깨기 위해 김 단장은 단원들과 동고동락하며 직접 동작 학습법을 고안하고 책까지 만들었다.
“3단계 학습법이라고 불러요. 1단계는 손을 바닥에 두고 발의 움직임을 손으로 따라하기, 2단계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자와 손을 잡고 1단계 발동작 따라하기, 3단계는 지도자의 팔다리 동작을 손끝으로 만져 촉각으로 스캔한 뒤 따라하며 위치 확인하기. 이렇게 가르치며 ‘배꼽 눈’이란 명칭도 만들었어요. 배꼽을 기준으로 방향을 알려 줘야 눈동자 움직이듯 몸이 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죠.”
무용 '경단녀(경력 단절녀)' 룩스빛을 만나다
김 단장과 룩스빛의 인연은 1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5세 때 무용을 시작해 20대 후반기까지 무용 예술인으로 살아온 그는 결혼 후 10년 가까이 ‘경력 단절녀’로 살아야 했다. 고민 끝에 결정한 39세의 늦깎이 대학원(사회체육학) 시절, 조교 생활을 하던 중 한 복지관으로부터 시각장애인들에게 댄스 스포츠를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받은 게 출발점이 됐다.
2009년, 3개월짜리 단기 프로그램으로 만난 인연은 2013년 룩스빛 창단으로 이어졌다. 이름에는 빛을 갈망한다는 의미의 ‘L(Light)’ 특별함의 ‘U(Unique)’ 무한대를 의미하는 ‘X’가 합쳐져 ‘아주 특별한 빛이 되어 세상을 무한대로 비춰 나가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다. 창단 당시 장애인 무용수로만 꾸려졌던 룩스빛은 3년 전 도약의 전환점을 맞았다. 비장애인 단원과 조화를 이뤄 작품의 수준을 끌어 올리고 장애를 넘어선 진정한 ‘하모니’를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20분 내외의 작품 하나를 준비하는 데는 평균 6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 동작 하나하나 쉬이 넘어갈 수 없는 고된 과정이지만 단원들은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파트너가 있어 즐겁다”고 입을 모은다. 룩스빛 안에서 ‘눈빛만 봐도 통한다’는 말은 ‘손끝만 스쳐도 통한다’로 통한다. 무대 위 동선 이동이 있을 때마다 파트너를 이룬 장애인, 비장애인 무용수는 손을 잡고 정해진 위치로 움직인다. 둘이 하나의 표현을 할 땐 동작이 데칼코마니처럼 보이도록 끊임없이 연습을 반복한다.
'룩스빛 하모니'의 기적, 파리의 기적으로
빛(LUX)으로 예술에 눈 뜬 기적은 파리에서의 기적으로 이어진다. 네 차례 정기공연을 포함해 지금까지 80여회 무대를 펼친 룩스빛은 오는 22일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대강당에서 열리는 ‘제15회 평화콘서트’에 공연을 올린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소프라노 조수미 등 세계적인 예술인들이 공연에 참여했던 무대다. 이번 콘서트에서는 찬양 ‘웨이 메이커(발레)’ ‘아리랑 랩소디(한국 무용)’ ‘아이 윌 팔로우 힘, 돈 워리 비 해피(재즈 댄스)’ 등 5곡을 선보일 예정이다.
1956년생부터 2000년생까지 나이대는 경계를 넘나들지만 단원 모두가 크리스천인 룩스빛에선 기도와 신앙이 든든한 울타리가 돼준다. 창단 멤버인 권기혜(67)씨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무대 위 무용수의 꿈을 룩스빛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뤄주신 것”이라며 웃었다. 권씨의 파트너인 이주아(26)씨는 “연습 때 함께 밥 먹으면서 서로의 기도 제목을 나눌 땐 하나님께서 단원들을 룩스빛으로 모이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계획하셨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며 웃었다.
룩스빛이 꾸는 꿈, 진정한 '소셜 패밀리'
김 단장은 “햇수로 14년째 단원들과 함께 해오면서 때로는 요나의 마음처럼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던 시간도 있었고, 리더로서 부족함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마다 룩스빛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면서 용기가 생겼다”고 고백했다. 그의 꿈은 룩스빛이 교육 과정으로서의 학교, 든든한 일터로서의 예술단으로 이어지는 진정한 ‘소셜 패밀리’가 되는 것이다.
“춤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 사랑담은 춤으로 울타리를 만드는 집이 됐으면 좋겠어요. 신체적 장애는 없어도 정신적 장애가 너무 많은 세상이잖아요. 우리의 무대가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까지 밝게 비춰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