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비 오는 날 같잖은 제 일대기를 보러 오셨으니 고맙고 고맙습니다.”
대한성공회 김성수(93) 주교가 15일 서울 대신동 영화관 ‘필름포럼’에서 열린 서울국제사랑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시몬 김성수: 우리는 최고다’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던진 첫 마디가 그랬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땐 곁에서 함께 영화를 보던 손학규 전 바른미래당 대표 등에게도 “지루하셨죠? 미안해요”라고 멋쩍어했다. 손 전 대표는 국내 첫 발달장애인 특수학교를 설립할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그를 도왔던 일로 영화에 출연했다.
교계와 사회에 수많은 족적을 남겼지만, 칭찬을 병적으로 싫어한 김 주교의 성품을 바로 보여주는 장면이 이날 상영관에서 여러 차례 연출됐다. 이번 영화를 찍은 남승석 감독조차 “너무 훌륭한 분이시지만, 당신의 업적을 설명하는 걸 너무 싫어해서 감독에게는 참 작업하기 힘든 분이어서 중간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말할 정도니 말이다. 그러나 남 감독은 “뵈면 뵐수록 아름다운 분이 계시다면 이런 분이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렇기에 이번 영화를 통해 기독교인뿐 아니라 신앙이 없는 분도 김 주교님을 만났으면 했다”고 했다.
영화는 김 주교의 손녀 규리씨가 자주 등장한다. ‘성경에서 있는 성직자’(배우 윤여정)라는 식의 극찬을 공치사로 여기는 할아버지에게 손녀는 “함께 한 추억이 많지 않으니 저희와 사진을 남긴다고 생각하시고 출연해달라”며 설득하며 김 주교의 삶을 기록해 나갔다.
김 주교와 아내 영국인 프리다 박사는 장애인을 진정으로 아꼈다. 영화 제목인 ‘우리는 최고다’는 김 주교가 ‘친구’로 부르는 장애인과 함께 외치던 구호다. 김 주교는 ‘일반 학교보다 더 좋은 특수학교’라는 평가를 받는 첫 발달장애인 특수학교인 성베드로학교를 설립했고, 프리다 박사는 발달장애 어린이집인 희망학교를 세웠다.
“프리다 여사님이 하셨던 말씀 중에 제일 감명 깊었던 게 우리 아이들은 놀아야 한대요. 제가 병원만 데리고 다니고 아이가 평범하게 생활할 수 있는 걸 뺏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 오니깐 평범한 아이들처럼 놀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영화에는 장애인 아이를 기르는 한 엄마가 출연해 울먹일 때 관객들은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김 주교의 맏아들 용이씨는 아버지 성공회대학교 총장 은퇴 후 강화도에 지적장애인 직업재활공동체인 ‘우리마을’을 세웠던 때와 화재로 손실을 보았을 때를 언급한다.
성공회대학교 총장 당시 학생의 부대를 찾아가고, 사비를 털어 자취생 저녁을 사주다 신용불량자가 된 사연, 대한성공회 서울 교구장이던 1987년 당시 6월 10일 ‘4·13호헌 철폐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는 등 일화도 수많은 성공회 관계자와 기업 담당자 등 지인 인터뷰 통해 잔잔하게 전해진다.
김 주교는 영화를 마친 뒤 아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1시간이 넘도록 관객과 함께했다. 아들은 귀가 잘 안 들리는 김 주교에게 관객 질문을 전해주는 역할도 했다. 존경받는 교계 지도자로서 다른 목회자에게 해줄 말이 없냐는 질문을 아들이 귀에 대고 전해주자 김 주교는 “없어요”라고 즉답해 좌중에 웃음을 안겼다. 그러면서 차분히 본심을 이어갔다.
“영국에 한 주교님 묘에 이런 후회의 말을 적혀 있다고 합니다. 주교가 됐을 때 여러 가지를 변화시키겠다는 다짐을 했답니다. ‘먼저 내 가정을 변화시키고, 또 우리 주교들을 변화시키고 그다음엔 교인들도 변화를 시켜야겠다.’ 그런데 죽음을 맞이하기 전 자기 생각이 크게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답니다. ‘아, 내가 먼저 변화돼야 하는구나.’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먼저 변화되면 다 변화될 거로 생각합니다.”
글·사진=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