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을사늑약에 승인하지 않았으니 조약은 무효다.”
1905년 12월.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미국 워싱턴에 있는 호머 베잘렐 헐버트(Homer B. Hulbert·1863~1949) 선교사에게 보낸 전보 내용이다. 고종이 을사늑약을 최초로 부인한 시점이 1906년 1월이라고 알려진 종전의 사실보다 한달 정도 빠른 시점이다.
이같은 내용은 헐버트 선교사가 해당 내용의 전보를 미국 국무부에 전달하고 뉴욕타임스를 통해 국제사회에 폭로한 사실이 담긴 화보집 ‘눈으로 보는 헐버트의 50년 한국 독립운동’을 통해 31일 정식 공개됐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회장 김동진)가 서울 마포구 100주년선교기념관에서 주최한 ‘헐버트 선교사 74주기 추모대회’에서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은 “2009년 해당 사실을 발굴하고 발표했으나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외국인 독립운동가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국민께서 이들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감사하는 문화인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해당 전보와 기사들을 번역해 화보집을 만들어 추모대회를 통해 최초 공개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헐버트 선교사는 1863년 미국 버몬트주에서 태어나 영어 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조선의 요청에 응해 1886년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그는 1889년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해외에 알렸으며 최초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펴내는 등 교육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또 고종을 도와 대한제국 국권 수호에 동참했으며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헐버트 선교사는 86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한국을 위해 살았다.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고 적힌 그의 묘비 문구에도 한국을 향한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대한민국 정부는 헐버트 선교사의 공로를 인정하고 1950년과 2014년 각각 건국훈장 독립장과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4년 만에 열린 추모대회에는 김경래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부이사장, 나치만 서울지방보훈청장, 로버트 포스트 주한미국대사관 공보공사 참사관, 이광섭 전농감리교회 목사 등 400여명이 참석했다.
나치만 서울지방보훈청장은 추모사를 통해 “헐버트 선교사는 일제의 박해로 미국으로 귀환하신 후에도 미국 전역을 다니며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등 한국을 위해 평생을 바치셨다”며 “헐버트 선교사가 보여준 국경을 초월한 사랑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고 전했다.
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