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마음을, 흘러가는 구름은 아니겠지요.”
부둣가에 앉아 최헌의 ‘앵두’를 부르는 진숙(염정아)의 목소리에선 여러 감정이 느껴진다. 영화 ‘밀수’에서 군천의 해녀들을 이끄는 진숙은 밀수판에 휩쓸리면서 비극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후회, 슬픔, 그리움, 미움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을 그는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속으로 집어삼킬 뿐이다.
지난달 21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염정아는 “극의 중심을 잡고 감정선을 이어가야하는 인물이어서 쉽지 않았다. 진숙은 많은 표현을 하지 않지만 모든 사연을 다 가지고 있는 캐릭터”라며 “춘자(김혜수)에게 가지는 감정의 깊이를 어느 정도 수위로 드러내야 할지 항상 고민했다”고 말했다.
물질에 수중 액션까지 소화했지만 사실 염정아는 물과 친하지 않다. 그는 “해녀들의 리더 역할을 맡았는데 사실 물이 무서워서 수영도 안 하고 산 게 나다. 그래도 류승완 감독, 김혜수와 이 작품이 정말 하고 싶었다”며 “꼭 해내야 하는 일이라 3개월간 열심히 수중훈련을 했다. 무섭다는 생각을 버리니 결국엔 되더라”고 돌이켰다.
춘자와 진숙처럼 염정아는 현장에서 김혜수를 많이 의지했다. 염정아는 “이 영화는 김혜수가 없었으면 안 됐다. 김혜수는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퍼줬다”고 말했다. 이어 “나한테는 ‘아가, 넌 사람들하고도 잘 지내고 성격도 좋고 연기도 좋고 왜 이렇게 착하니’ 하며 칭찬을 해줬다. 내가 이 나이에 누구한테 그런 칭찬을 듣겠나 싶었다”며 웃었다.
류 감독은 그가 마음놓고 연기할 수 있도록 해줬다. 염정아는 “류 감독은 정확하다.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집요하게 하는데 배우한테는 그게 굉장히 믿음과 안정감을 준다”며 “유머가 많은 사람이지만 어느 순간 눈빛이 변한다. ‘하나도 안 놓치는구나, 그래서 류승완이구나’ 감탄했다”고 말했다.
대표작 ‘스카이 캐슬’을 비롯해 다양한 작품에서 염정아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영화 ‘인생 아름다워’는 지난해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줬고, 2004년 ‘범죄의 재구성’ 이후 최동훈 감독과 오랜만에 작업한 영화 ‘외계+인’에선 흑설이라는 캐릭터로 인상을 남겼다.
이번 영화를 통해 가장 크게 얻은 건 사람이다. 염정아는 “보통은 촬영 끝나고 집에 가기 바쁜데 ‘밀수’ 현장에선 사람들이 집에 가질 않았다. 30분이라도 더 남아서 같이 밥차에 남은 밥을 먹거나 분장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면서 “연기도 연기지만 역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행복하게 작품을 찍은 내가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느꼈다”고 했다.
배우 생활을 이어나가는 힘은 일상에서 나온다고 그는 말했다. 염정아는 “단순한 편이라 심각한 고민을 잘 하지 않는다. 빨리 좋은 작품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린다”며 “엄마이자 아내로 살면서 연기하는 에너지를 얻는다”고 했다.
최근엔 염정아가 지인들에게 만들어 준 식혜가 화제가 됐다. 염정아는 “맛있게 먹을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만들다보니 아주 기분이 좋았다”면서도 “아무도 안 도와주는데 너무 많이 만들어서 힘들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염정아는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해 나가는 중이다.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시도해보는 데 신이 나 있다. 작품 제안을 해준다는 것 자체가 신나는 일”이라며 “나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여태까지 해보지 못했던 역할들을 잘 해내고 싶다”고 말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