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야 나름 모두 아름다웠고 패기가 넘쳤겠지만, 사람이 나이 들어 병들고 연약해지면 타인의 앞에 내 치부를 다 들어내 놓고 돌봄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마지막 날까지 정신 말짱하게 살면서 스스로 먹고 싸고 하다가 품격 있게 가는 일은 모든 노년의 희망 사항일 터. 더하여, 죽음 그 이후의 현실이 천국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누구나가 마찬가지. 누가 지옥에 가고 싶겠는가.
성경 말씀이 일점일획도 변함없는 사실이고 보면, 천국과 지옥도 곧 닥치게 될 “현실”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아야 한다. 서글픈 일은, 교회를 몇십 년을 다니고 이런저런 직책으로 불린 바 되면서도 “믿음”하고는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오죽하면, Charles de Foucauld(샤를르 드 푸코)라는 프랑스 사제가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라고 지적을 했을까.
2014년 10월 31일, 그야말로 뜻밖의 청빙을 받고 애리조나 소도시의 작은 교회로 부임을 했을 때가 바야흐로 내 나이 만 67세. 그 사건 자체도 황당한 일이었지만, 기껏 죽을 둥 살 둥 공부한 것을 다 내려놓고 온 교회에서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내몰림”을 당한 것은 더더욱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럴지라도, “무슨 뜻이 있으시겠지!” 굳세게 믿으며, 노인 아파트의 할머니들과의 성경공부, 홈 리스 분들에게 “5분 묵상”으로 복음 선포하기, 호스피스 분들의 마지막을 지켜주게 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 가운데 정작 어떤 사역이 본론이었는지는 나로서는 짐작할 수가 없다. 다만, 이런저런 상황에서 복음을 나누게 해 주신 사람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천국 백성”이 되게 해 주셨다면, 그것 이상의 기쁘고 감사한 일이 더 있으랴.
2020년 2월부터 코로나가 시작되었고, 그 연고로 호스피스 사역이 중단되게 되었다, 환자 방문이 가능치 못하게 되었으므로. 그 시점에서 공항이 가까운 애리조나의 수도, Phoenix(불사조)로 이사를 감행하게 되었다. 이사를 할 생각을 하게 된 동기는 내 주치의의 경고 때문이었다. 그가 “You may die suddenly with heart attack!”(당신은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을 수가 있습니다!)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내게 했다. 혹시라도 그렇다면…? 아이들이 편하게 올 수 있는 공항 근처로 이사를 하는 것이 맞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 소도시는 공항이 멀어서, 아이들이 갑자기 죽은 제 어미에게 오려면 비용도 시간도 많이 들게 될 것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애리조나 소도시에서의 이야기들이다.
<가족 구원>
1982년 12월 6일, 미국 Los Angeles에서의 새날이 밝았다. 너무 놀랐던 일은 시모와 막내 시누가 이미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기도는 계속 드렸어도 차마 믿어지지는 않았었다. 전도하면 “내 발가락을 믿어라!”하시던 분이었으니. “엄마의 외동아들”인 그, 그렇게도 완강했던 그가 엄마를 따라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너무 감사했던 것은 교회가 바로 옆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걸어서도 뛰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 그것도 순복음 교회라니! 이런 일들을 어떻게 “우연”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하나님, 이게 현실이라고요?”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예레미야 33:2, 3)
<빌립보서 4:13>
이민 초기, L.A.에 도착한 그달부터 바느질 공장에 다니다가 미국회사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게 한국어로 해도 쉽지가 않은 패턴메이커 일을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해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당시, 내 작업 테이블 위에는 성경과 나무 십자가, 영한/한영사전과 영어/스패니시 사전이 대기 되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게 된 일이지만 회사의 운명이 달린 Pattern Making이다보니 계속 기도하면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일하다가 막히면 창밖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온종일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를 고백하고 또 고백했다. 윗사람이 내게 와서 작업을 지시할 때에 알아들을 수가 없을 때면….(계속)
◇김승인 목사는 1947년에 태어나 서울 한성여고를 졸업하고 1982년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LA 기술전문대학, Emily Griffith 기술전문대학을 나와 패션 샘플 디자인 등을 했다. 미국 베데스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북미총회에서 안수받았다. 나성순복음교회에서 행정 비서를 했다. 신앙에세이를 통해 문서선교, 캘리포니아에 있는 복음방송국(KGBC)에서 방송 사역을 했다.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논픽션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했다. 이메일 313aimee11@gmail.com
정리=
전병선 미션영상부장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