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여친 집에 휘발유 4ℓ 방화…대법 ‘살인미수 유죄’ 확정

입력 2023-08-15 11:30
국민일보DB

대학생 A씨는 지난해 3월 여자친구 B씨와 헤어지고도 계속 주변을 맴돌았다. B씨 모친까지 찾아갔고 스토킹으로 신고당했다. 앙심을 품은 A씨는 B씨 모친 미행 등으로 집 주소를 알아냈고, 그해 6월 10일 저녁 열쇠업자를 불러 도어락을 해제한 뒤 B씨 차키를 훔쳤다. 이튿날 낮에는 B씨 차량을 뒤지기도 했다. B씨가 계속 자신을 피하며 경찰에 신고하자 분개한 A씨는 같은 달 21일 새벽 복도식 아파트인 B씨 집 현관문 앞에 불을 질렀다.

15일 국민일보가 확보한 A씨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살인미수·현주건조물방화·야간주거침입절도 등 5가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씨의 방화 행위에 대해 살인미수죄를 물을 수 있느냐를 두고 1, 2심 판단은 엇갈렸다.

1심은 “A씨가 살인 의도로 방화를 저질렀다는 점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부족하다”며 살인미수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A씨는 방화 범행 며칠 전 회칼을 구매해 손잡이 쪽에 청테이프를 감아두고, 염산을 사서 플라스틱병에 옮겨둔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1심은 “A씨는 기분이 좋지 않아 우발적으로 회칼·염산을 구매했을 뿐 B씨에게 쓰려 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실제 쓰려고 시도한 정황도 찾기 어렵다”며 살인 의도가 있었는지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A씨 방화로 B씨 집 현관문 앞 복도 타일이 바닥에서 분리됐고 복도 창문도 깨졌다. 잠에서 깬 B씨는 탈출하려 했으나 현관문 손잡이가 너무 뜨거워 문을 열지 못하다 소방관 화재진압이 이뤄진 후 집 밖으로 대피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재판에서 “겁을 주거나 내가 죽을 만큼 힘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불을 질렀다”며 “살해 의도가 있었다면 현관문 바로 앞에 휘발유를 뿌렸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1심은 이에 대해서도 “화재 감식 결과를 보면 A씨가 현관문이 아닌 그 맞은편 벽면 아래 휘발유를 뿌린 것으로 추정되고, 이는 A씨 주장과도 부합한다”고 밝혔다. 방화 전 A씨가 ‘휘발유 다 타면’ 등을 검색한 점을 고려하면, “휘발유가 다 연소 되면 자연스레 불도 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A씨 진술도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 결국 1심은 살인미수를 뺀 나머지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A씨에게 징역 4년6개월을 선고했다. 검찰은 즉각 항소했다.

2심은 검찰 항소를 받아들여 1심 판결을 파기하고 살인미수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다. 2심은 “A씨가 칼날과 손잡이 사이에 청테이프를 감아뒀는데 주방용으로 쓰던 다른 칼에는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하면 살인 목적으로 쓰기 위한 준비행위를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밝혔다. A씨가 회칼과 염산 구매 전 ‘사시미칼살인’ ‘염산테러’ 등을 검색한 점도 함께 지적했다.

방화에 대해서도 “A씨가 범행 후 미리 구비해둔 번개탄을 피워 자살을 시도한 점 등에 비춰보면 단순히 겁을 주려 불을 질렀다는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밝혔다. 2심은 A씨가 방화를 저지른 시각(새벽 3시), 현관문 외에는 탈출 방법이 없는 B씨 집 층수(고층), 문 앞에 뿌린 휘발유 양(4ℓ), 화재 규모 등을 고려하면 “살인에 대한 확정적 고의로 방화를 저질렀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고 지적했다.

2심이 살인미수를 유죄로 판단하면서 형량은 징역 5년으로 늘어났다.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지난달 27일 “살인미수죄의 고의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며 2심 판결을 최종 확정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