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음성 출신으로 구한말 경기 용인 등 일대에서 의병으로서 허위부대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허위부대가 패한 뒤 몸을 피해 은신하던 중 1912년 용인 백암면 가창리에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뿌리를 내린 최삼현(1890~1953) 지사의 7남매 중 다섯째인 최완영(사진·85)씨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던 그날을 78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최씨는 13일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7살이었지만 뚜렷이 기억이 난다. 8월 15일 해방이 되고 이틀 후인 17일, 아버지는 종이에 그린 태극기를 가족들의 손에 쥐어주며 함께 들고 당시 백암면사무소(경기지역 의병이 거점으로 삼아 활동했던 ‘백암장터’의 중심지)로 가 ‘조선독립만세’(대한독립만세)를 아버지가 선창하고 우리가 수없이 따라 외쳤다”며 “가족들이 만세를 부르자 골목 이곳 저곳에서 사람들이 나와 40여명이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회상했다.
이어 “원래는 15일 해방이 돼 바로 만세를 부르려 했으나 아버지께서 밖에 나갔다 오시더니 아직도 일본 순사가 긴칼을 찬 채 말을 타고 돌아다녀 안되겠다”고 늦어진 이유를 설명했다.
최씨는 해방이 되고 생전에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왜놈들은 못된 놈들이다. 그놈들 때문에 나라가 하마터면 없어질 뻔 했다”며 “‘나라가 우선이고 가정, 가족이 두 번째’라는 것을 너희들은 명심해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최씨는 아버지가 의병으로 활약한 다양한 증언과 정황이 있음에도 확실한 객관적 자료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때 독립유공자 서훈 심사에 연거퍼 떨어지고 윤석열 정부에 또다시 아버지 명예 회복을 위한 마지막 노력을 하고 있다며 자신을 질책했다.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고 1991년에는 지방자치단체가 부활돼 첫 용인군의원(용인특례시가 당시는 용인군)에 당선되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였던 최씨는 당시에는 아버지의 의병 활동을 증언해줄 사람도 많아 아버지가 독립유공자가 되는데 어렵지 않았지만 나서지 않고 오히려 숨겼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 최씨는 “(아버지가) 의병 활동 때문에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이름까지 ‘최돌산’으로 바꿔가며 농촌에 숨어 비참하게 사셨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려웠다”고 실토하며 후회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버지의 의병 활동으로 아버지, 그리고 가족이 힘들었던 내용들을 가장 속속히 알고 있는 나까지 세상을 떠나면 아버지의 명예 회복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요즘은 밤잠까지 설친다”고 하소연 했다.
우상표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은 “1907년 13도 창의군을 이끈 허위 의병장 부대원으로 참전한 최삼현 의병은 허위 의병장 피체 이후 경기일대 야산에서 숯장수로 은신해 친일파들을 습격하는 활동을 계속했다”면서 “극소수의 의병장을 제외하곤 참전 의병의 이름 또는 증거를 남긴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름없었다. 그런 시대 환경적 여건을 무시하고 일제 진압부대의 작전계획이나 수형기록 등 일제가 남긴 증거위주의 공훈 심사는 모순이며 이율배반”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2002년 3월 발족해 용인의 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선양하기 위한 비영리단체로 현재는 용인문화원 부속 단체다.
이 단체는 2007년 개최한 학술세미나에서 ‘1907년 어느 의병의 삶과 투쟁사례’라는 제목으로 최삼현 지사의 의병활동을 상세하게 다룬 바 있다. 이 세미나는 후원으로 국가보훈처(현재 국가보훈부)도 명기돼 있기도 하다.
이들 자료와 증언에 따르면 최삼현 지사는 충북 음성 유력 집안의 5대 독자로 태어나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약 5년간 의병활동을 했다.
특히 최 지사와 절친했던 박순종(2002년 작고) 씨가 도장까지 찍어가며 1983년 작성한 진술서를 보면 “자네들은(최씨의 형제자매 지칭)는 우리가 아니면 태어나지도 못했다. 최 지사가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본놈들에게 쫓겨 우리 집에 왔을 때 광안에 빈독을 엎어 그 곳에 다섯 달이나 피신시켜 줬다. ‘의병을 숨겨주다 들키면 징역가니 더 이상 피해를 줄 수 없다’며 (최 지사가)스스로 떠났다”고 전했다.
몇 해에 걸친 도피생활 끝에 최 지사는 의병 동료 2명과 함께 1912년 용인으로 숨어들어와 인근 동네 부잣집으로 흩어져 정착을 했다. 최 지사는 가창리 학자골 안씨댁에 밥만 먹여주는 조건으로 농사일을 하게 됐고 20대 중반 이웃 김씨 집 데릴사위로 결혼을 했다.
의병들의 삶이 대개 그러했듯이 최 지사도 결혼 후 5남 2녀를 두고 해방될 때까지 ‘최돌산’이라는 가명으로 과거 의병 활동 행적을 철저히 숨기고 살았다. 해방 후에도 가슴 속 깊은 얘기는 8·15 광복절 등 특별한 날이었다고 최씨는 전했다.
최씨는 “음식 투정을 하면 어머니는 ‘너희 아버지는 나라를 구하려고 5년여 간 찬밥도 못 먹고 밤잠도 못 주무시면서 고생하셨는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인지 아버지께서는 절대 찬밥을 드시지 않으셨어요”라고 말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용인=강희청 기자 kangh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