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업체가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수의계약으로 체결해 온 ‘부스터 펌프’ 제품 구매 계약을 10년 가까이 독식해 온 사실이 확인됐다. 부스터 펌프는 수압을 올려 각 층으로 물을 공급하는 건물 급수 시스템의 핵심 장치다. 건물 공사에 필수 요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당 업체는 LH가 수의계약을 허용하는 조달청의 ‘우수제품’ 제도를 활용해 발주한 계약을 98% 가까이 따냈다. 그 자체는 합법적이지만 이 업체에 전직 LH 처장급 인사가 재취업해 근무하고 있다는 점이 논란을 낳는다. 전관을 활용해 제도의 맹점을 파고 든 ‘이권 카르텔’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14일 조달청 국가종합전자조달시스템 ‘나라장터’에 따르면 2014년~ 2023년 7월까지 9년7개월간 LH가 수의계약으로 체결한 부스터 펌프 계약총액은 213억5166만원에 달한다. 이 중 97.6%인 208억4814만원 규모 계약이 A사와 체결됐다. 해당 계약이 경쟁입찰 방식 대신 특정 업체를 지정할 수 있는 수의계약 방식으로 체결된 이유는 A사의 부스터 펌프 제품이 우수제품으로 지정돼 있기 때문이었다. 조달청 우수제품제도는 우수제품으로 선정된 중소·중견 기업 제품의 경우 발주처가 금액 제한 없이 수의계약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문제는 A사 외에 동등한 기술력을 지닌 업체들이 더 있다는 점이다. 조달청에서 우수제품으로 선정한 부스터 펌프 제품 개발사는 A사 외에도 3곳이 더 있다. 하지만 이들과 LH 간 수의계약 실적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같은 기간 동안 B사는 2억5656만원(1.2%) 규모 계약을, C사는 1억832만원(0.9%) 규모 계약을 체결하는 데 그쳤다. D사의 수의계약 실적은 1억원에도 못 미친다.
유독 A사의 LH 수의계약 실적이 높은 이유로 LH 퇴직자가 근무한다는 점이 영향을 미친 거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김수흥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4개 업체 중 LH 출신이 재취업해 근무 중인 회사는 A사가 유일하다. A사에 재취업한 이는 LH 내에서 고위직인 처장까지 역임한 인물로 알려졌다. 2015년 전후로 재취업해 현재까지 근무 중인 사실도 확인됐다. A사가 LH의 부스터 펌프 수의계약을 싹쓸이해 온 기간과 LH 퇴직자의 재취업 기간이 맞물린다.
우수제품 제도를 악용한 사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우수제품에 선정되는 절차는 지극히 까다롭다.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심사를 포함해 2차례의 심사를 통과해야만 우수제품으로 지정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만큼 동일한 제품이라면 품질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이후로는 영업력이 성패를 가른다. LH처럼 대형 발주처의 전 직원이 있다면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건설업계에서는 유사 사례가 더 있다고 지적한다. LH가 발주하는 구매 계약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LH 퇴직자가 재취업한 업체가 수두룩하다는 점도 이 의혹에 힘을 싣는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LH를 둘러 싼 합법적인 이권 카르텔이 만연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의혹 제기에 대해 A사 관계자는 “LH 출신자가 근무하고는 있지만 LH 대상 영업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세종=신준섭 기자 sman32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