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등의 실마리가 절실한 한국 수출의 앞길에 ‘환경 장벽’이 높게 쌓이고 있다. 유럽연합(EU)과 미국이 ‘친환경 공급망 구축’을 명분으로 보조금, 관세라는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꺼내들었다. 반도체·전기차 등의 첨단 기술 분야를 물론 철강 등의 전통적 수출품까지 영향권에 들어섰다. 국가별로 제각각의 환경 규제를 내놓으면서 산업계에선 개별 대응 자체가 쉽지 않다고 호소한다.
유럽연합(EU)과 회원국들은 최근 친환경 규제를 전방위로 쏟아내고 있다. 프랑스는 지난달 28일 이른바 ‘프랑스판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불리는 전기차 보조금 개편안 초안을 공개했다. 개편안은 전기차 제조 과정에서 발생한 온실가스를 이산화탄소 배출량으로 환산하고, 여기에 재활용 점수를 합산해 최소 60점을 넘으면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철강, 알루미늄, 배터리 등 6개 부문에 이를 적용한다.
프랑스는 내년부터 6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쳐 시행할 예정이다. 현지 전기차 시장에서 5위에 올라 있는 현대차·기아의 판매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진다.
산업계에선 EU의 친환경 정책이 ‘무역 장벽’을 높이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고 분석한다. 주로 중국 전기차 등에 대한 환경 기준을 강화한다는 취지지만, 한국 기업들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오는 10월 시범 시행에 들어가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의 경우 철강, 시멘트, 알루미늄 등 6개 품목의 탄소 배출량을 따진다.
배출량이 EU 기준을 넘는 제품을 수입하는 현지 기업은 일종의 ‘탄소 관세’처럼 배출권을 사야한다. EU 수출 비중이 13%에 이르는 한국 철강업계로선 CBAM이 전면 시행될 2026년까지 EU의 저탄소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수출 길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산업계 관계자는 “향후 CBAM 적용 범위가 니켈, 리튬 등의 원소재로 넓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10일 밝혔다.
미국도 친환경 규제 강화에 속도를 붙이는 중이다. 캘리포니아주는 지난해 9월 과불화화합물(PFAS)의 섬유·의류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정하며 규제에 나섰다. PFAS는 마찰과 고온을 견딜 수 있어 산업재로 두루 쓰인다. 다만, 자연 분해되지 않아 심각한 환경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유럽화학물질청(ECHA)도 PFAS 사용 제한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 PFAS 규제가 본격화하면, 한국의 완성차·반도체 업계는 당장 대체물질을 확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여기에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올해 하반기 안에 상장사들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확정할 예정이다. ESG 공시에는 미국 상장사 뿐 아니라 납품기업, 협력업체의 탄소 배출량 등도 포함된다. 미국에 수출하려는 한국 기업들도 미국 현지의 ESG 기준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박성호 코트라(KOTRA) 북미지역본부장은 “미국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 기업들이 ESG 기준의 영향권에 들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부는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그동안 EU의 CBAM, PFAS 규제 대응에 나섰던 산업통상자원부는 프랑스의 전기차 보조금 개편안을 놓고도 의견 수렴에 들어갔다. 이를 모아서 프랑스 정부에 우리 입장을 전달할 방침이다. 산업부는 지난 6월 ‘제19차 한·프랑스 산업협력위원회’를 열고 “전기차 보조금 기준에 차별적 요소를 배제해 달라”는 의견을 전달했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