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탈출 시킨 북한 아이들 ‘탈북민 1호’ 변호사 되기까지

입력 2023-07-25 16:02 수정 2023-07-25 18:28
은춘표(가운데) 선교사가 25일 서울 용산구 절제회관에서 이영현(왼쪽) 변호사를 중국에서 한국으로 탈출시킨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오른쪽은 은 선교사의 아내 임정하 선교사. 신석현 포토그래퍼


2002년 4월, 중국에서 사역하던 은춘표(79) 선교사가 미국에 머무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 소포 3개 보냈는데, 잘 도착했는지 확인 좀 해줘요.” 아내 임정하(77) 선교사가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도착 예정 날짜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소포는 도착하지 않았다. 은 선교사의 속이 타고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던 때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잘 도착했대요. 다행이에요.” 그제야 그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은 선교사 부부가 말한 ‘소포 3개’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탈출시킨 탈북민 3명을 뜻했다. 은 선교사는 중국에서 탈북민을 교육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다가 탈북민 3명을 한국으로 보냈다. 그중에는 탈북민 1호 변호사가 된 이영현(40)씨도 있었다.

25일 서울 용산구 절제회관에서 은 선교사 부부와 이 변호사를 만났다. 이들의 인연은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미국에서 살던 은 선교사는 홍콩 지하교회에 비밀리에 성경을 전달하는 등 조선족을 위한 자비량 사역을 하다가 중국에서 탈북민 이 변호사를 만나고 탈북민 사역으로 방향을 바꿨다.

“당시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던 북한의 어려운 상황을 듣고는 있었는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중국으로 온 깡마른 영현이를 보니까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탈북 아이들을 위한 사역을 하는 게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이후 미국 한인교회협의회에서 풀타임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은 선교사는 중국에 아파트 5개를 빌려 50여명의 탈북 학생을 돌보며 그들의 아버지가 됐다. 2001년에는 조선족 학교로 위장한 탈북민 학교를 세웠다. 컴퓨터가 40개나 있을 정도로 최신식으로 지은 학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 스페인 대사관에 탈북민 25명이 뛰어들었는데 학교에 있던 학생 2명이 그 무리에 합류한 것이 알려졌다. 곧 학교에 공안이 들이닥칠 것을 염려해 은 선교사는 이 변호사를 포함한 3명을 한국으로 탈출시켰다. 나머지 탈북민들을 안전한 곳에 피신시키자마자 학교에 공안이 찾아왔다. 은 선교사는 몇 날 며칠 조사를 받다가 결국 중국에서 강제추방 당했다. 그렇게 보낸 ‘소포’ 중 하나였던 이 변호사를 나중에 하나원에서 만났을 때 은 선교사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변호사는 “당시 중국에서 탈출하는 급박한 상황에서는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는커녕 내가 도중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까지 각오하고 있었다”며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살아서 아버지를 만났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이 안 된다”고 돌아봤다.

은 선교사는 이 변호사를 탈출시킨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이 변호사가 하나원을 퇴소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함께 살며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했다. 틈틈이 탈북민 커플의 결혼식을 시켜주는 등 탈북민 돌봄도 계속 했다. 아내 임 선교사는 미국에서 사업을 계속하면서 남편을 대신해 중국 탈북민 학교 사역까지 오랜 시간 이어갔다.

은퇴 후 은 선교사 부부는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은 선교사는 특수학교 학생들의 등하교를 도우면서 여전히 소외 아이들을 돌본다. 이 변호사는 부부는 물론 조카들까지 살뜰히 챙기며 아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부부에게도 자녀가 셋이나 있지만 이 변호사뿐만 아니라 탈북민 학교에서 동고동락한 아이들 모두가 부부의 자랑거리이자 평생의 기도 제목이다. 당시 부부가 탈출시키지 않았던 아이들도 지금은 모두 대한민국의 일원이 돼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

은 선교사는 “엊그제도 10여명의 아이들이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보약 지어 드시라며 용돈까지 주더라”며 “아이들이 예수님 잘 믿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말곤 바라는 게 없다”이라고 웃었다. 부부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앞으로도 아이들과 북한을 위한 기도를 계속할 예정이다.

“피를 나누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사랑스러움과 자랑스러움이 동시에 듭니다. 모든 것은 우리 부부를 사용하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며 하나님이 앞으로도 우리 아이들을 지켜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겠습니다.”(임 선교사)

박용미 기자 m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