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후기인 1890년. 인천 제물포항에 25세의 젊은 미국인 여의사가 발을 내디뎠다. 이 사람의 이름은 ‘로제타 홀’. 그가 편안한 고국을 떠나 척박하고 낯선 동방의 한 작은 나라에 온 이유는 미국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가 그를 조선 의료선교사로 파송했기 때문이다.
조선 여성들을 위한 헌신
조선에 오자마자 로제타 홀이 강렬하게 목도한 것이 있었다. 바로 처참한 조선 여성들의 삶이었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는 여성들에게 수많은 제약이 가해졌고, 여성들은 부당한 피해와 육체적인 고통을 겪어도 제대로 구제받지 못했다.
큰 충격을 받은 로제타 홀은 이때부터 조선 여성들의 삶을 돕는 데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우선 그는 광혜여원과 인천부인병원(인천기독병원 전신)을 설립해 여성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해줬다. 이어 맹인소녀를 대상으로 하는 국내 첫 시각장애인 학교인 평양여맹학교를 세웠고, 최초로 개발된 한글 기반 점자를 바탕으로 교육했다.
로제타 홀은 조선 여성들의 잠재력에도 주목, 여성 의료인들을 양성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1903년 우리나라 최초로 간호사 양성소를 개설했고, 1928년에는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개설해 여의사 양성에 전념했다. 그 결과 최초의 조선 여의사인 박에스더가 배출됐다. 조선 여성들을 위한 로제타 홀의 남다른 헌신은 1933년 그가 미국으로 귀국할 때까지 계속됐다.
잊혀진 역사 되살린다
하지만 로제타 홀은 그동안 우리나라 의학사나 교육사에 잘 드러나지 않았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그에 대한 기억의 흐름이 단절됐기 때문이다. 7일 로제타 홀 기념관 개관 2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주요 발표자로 나선 탁지일 부산장신대 교수는 “한국 교계가 로제타 홀의 헌신을 기억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뼈아픈 일”이라고 진단했다.
최근 들어 로제타 홀의 헌신을 기억하고 계승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지난 4월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19세기 말 한국에 온 미국인 선교사들의 헌신을 이야기하면서 로제타 홀을 언급했다. 국민들에게 비교적 생소했던 로제타 홀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현재 정부에서는 로제타 홀에 대한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를 검토하고 있다. 무궁화장은 1등급 국민훈장으로, 대통령을 제외한 국민 내지 외국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대한민국 훈장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적극 협조함에 따라 향후 로제타 홀에 대한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가 유력시되고 있다.
로제타 홀이 세운 인천기독병원은 2021년 설립 100주년을 맞이해 ‘로제타 홀 기념관’을 만든 후 그의 헌신을 기리고 다방면으로 알리고 있다. 로제타 홀 기념관 개관 2주년 기념 심포지엄도 잊혀진 역사를 되살리는 중요한 활동이다. 앞으로도 로제타 홀 포럼, 학술대회, 장학사업 등 다양한 활동이 전개될 예정이다.
심포지엄을 주관한 강경신 기념관장은 “흔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했다”며 “그 어려웠던 일제 침략과 수탈의 시기에 조선 사람들을 치료하고 가르치며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을 기리는 것. 그리고 그의 삶과 헌신, 박애와 사랑, 희생정신을 다음세대에 널리 전파하는 것은 의미있고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최경식 기자 ks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