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가 덮치는 산불에도…인접마을 ‘비상소화장치’ 없어

입력 2023-06-28 00:01 수정 2023-06-28 10:42
지난 4월 11일 강원도 강릉시 난곡동의 한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을 피한 주민들이 강풍으로 인근 주택에 불이 옮겨붙은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대형 산불시 불길로부터 민가를 지킬 수 있는 ‘비상소화장치’가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지난 2년 사이 대형 산불이 자주 발생한 경북·경남 지역은 비상소화장치가 거의 없는 것과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녹색연합이 27일 소방청으로부터 받아 공개한 ‘비상소화장치 지역별 설치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전국 산림인접마을에 설치된 비상소화장치 1012개 중 86%인 871개가 강원 지역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산불 피해가 잇따랐던 경북과 경남 지역의 산림인접마을에는 비상소화장치가 턱없이 부족했다. 경북 지역 산림인접마을엔 30개, 경남 지역 산림인접마을엔 5개의 비상소화장치가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대형 산불로 큰 피해를 본 경북 울진의 경우 이달 초 울진군 8개 읍면 지역에 비상소화장치가 71개 추가 설치됐다. 하지만 정작 산불에 취약한 산림인접마을엔 비상소화장치가 단 2개뿐이었다. 산불이 있었던 영덕군과 봉화군에선 산림인접마을 내 설치된 비상소화장치가 0건으로 조사됐다. 2020년과 2021년 두 해 연속 산불을 겪었던 안동시도 산림인접마을에 비상소화장치가 없다.

경남의 경우 합천군에서 올해 첫 대형 산불이 발생하는 등 피해가 커지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비상소화장치의 설치율이 저조했다. 산불이 발생한 합천군(7개)과 하동군(6개), 산불 발생빈도가 높은 함양군(7개), 산불 위험지역 거창군(2개)으로 파악됐다. 녹색연합은 “군마다 산림인접마을이 수백 개가 넘는 점을 고려하면 거의 설치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비상소화장치. 녹색연합 제공

지난 3년간 전국에서 산불로 소실된 주택은 2212개소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산불 피해 지역에 특별 재난 지구를 선포하는 것보다 사전에 예산을 투자해 비상소화장치를 설치해 피해를 막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한다.

비상소화장치는 소화장치함과 호스릴, 앵글밸브 등으로 구성된 일체형 소방시설을 말한다. 호스를 옥외소화전 등과 연결하면 신속하게 물을 뿌릴 수 있어 산불 발생 시 초기 대응 능력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꼽힌다. 최근 대형 산불은 재난 대비 수준을 뛰어넘는 속도와 양상을 보여 소방헬기나 소방차 지원이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산불에 대응할 수 있는 ‘비상소화장치’의 효과를 인정받아 올해 들어 627개가 추가 설치됐다”며 “그러나 내년까지 비상소화장치 설치가 필요한 지역은 보수적으로 추산해도 2088개로 예상되는데, 예산 확보가 더뎌 수요조사 대비 설치 확대가 느리다”고 지적했다. 국내 지형상 64%가 산지이고, 산지 인근 마을당 3개 정도의 비상소화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서 전문위원은 “산림과 인접 마을 및 건축물의 이격거리를 전수 조사해 위험도가 높은 곳부터 비상소화장치를 우선 설치해야 한다”며 “아울러 이 조사를 바탕으로 산사태 위험 지역과 같이 산불 위험지역을 지정해 체계적인 관리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해시 부곡동 승지골에 설치된 산림 인접 산불 비상소화장치 모습. 녹색연합 제공

실제로 비상소화장치의 효과는 대형 산불 발생 당시 이미 입증된 바 있다.

축구장 면적(0.714㏊) 1700배가 넘는 산림이 소실되고 약 900억원에 달하는 재산피해를 낸 2019년 고성·속초 산불 당시 고성군 토성면에 있는 홍와솔 마을은 산불 발생 19일 전 소방전문가 출신 주민의 제안으로 비상소화장치를 설치했다.

불길이 치솟자 주민 10여명이 비상소화장치를 이용해 약 5시간 동안 진화작업을 벌였다. 이 덕분에 전체 23가구 중 19가구는 화마를 피하는 등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다.

지난 4월 발생한 강릉 산불 피해 현장. 녹색연합 제공

지난 4월 발생한 강릉 산불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펜션이 몰려 있는 강원 강릉시 저동골길 마을 ‘황토민박’만이 화마를 피했는데, 70세가 넘는 펜션 주인이 직접 비상소화장치를 사용해 집을 지킨 것으로 알려졌다.

이보다 한해 전인 지난해 강릉 옥계면 산불 때도 비상소화장치는 적잖은 효과를 거뒀다.

녹색연합은 “지난해 3월 강릉시 옥계면에서 발생한 산불이 동해시 승지골 괴란마을로 확산할 때를 비롯해 다양한 산불 현장에서 비상소화장치는 인근 마을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며 “이와 같은 사례로 미루어 보아 비상소화장치를 전국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강민 기자 riv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