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발진 의심’ 손자 잃은 60대…“EDR기록 신뢰성 상실”

입력 2023-06-26 14:13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로 12살 손자를 잃고,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된 60대 할머니가 지난 3월 20일 첫 경찰조사를 마치고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경찰서를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로 12살 손자를 잃은 60대 운전자 측이 차량 제조사를 상대로 낸 민사소송의 두 번째 변론기일을 앞두고 급발진 주장 논리를 강화하고 나섰다.

26일 소송대리를 맡은 하종선 변호사(법률사무소 나루)에 따르면 원고 측은 최근 춘천지법 강릉지원 민사2부(박재형 부장판사)에 낸 준비서면에서 사고기록장치(EDR)의 신뢰성 상실 근거와 최근 급발진 주장 운전자의 무죄 판결을 언급했다.

차량 전복에 정신 잃었는데 ‘풀 액셀’이라고?

원고 측은 운전자 A씨가 차량이 오른쪽으로 뒤집힌 상태에서 가속페달을 99%(풀 액셀) 계속 밟았다는 EDR 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차량이 전복되고 몸도 옆으로 쓰러지는 상황에서 운전자가 가속페달을 99~100% 지속해서 밟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시 A씨는 차량이 벽을 뚫고 나가면서 정신을 잃었고, 에어백이 터지면서 얼굴에 맞아 자세 균형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운전자가 가속 페달을 100% 계속 밟았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원고 측은 A씨의 사례와 과거 급발진 사례에서 모든 EDR 기록이 ‘가속페달 변위량 99% 혹은 100%, 브레이크 OFF’를 기록한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기록을 두고 자동차 분야 전문 교수가 “급발진 사고에서 예외 없이 나타난 현상”이라는 취지로 발언한 점을 들어 EDR 기록의 신뢰성 상실을 강조했다.

가속페달 변위량은 가속 정도를 퍼센트(%)로 변환해 나타내는 기록이다. 99%부터 ‘풀 액셀’로 평가된다.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급발진 의심 사고 차량의 모습. 강릉소방서 제공

30초 동안 가속 페달을 브레이크로 착각하긴 어렵다

A씨 측은 최근 판례가 A씨 사건과 유사하다는 점도 짚었다. 대전지법은 사망사고를 내고 차량 급발진을 주장한 50대 운전자에 대해 이달 중순쯤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A씨 측은 해당 재판부가 “약 13초 동안 가속페달을 브레이크로 착각해 계속 밟는 과실을 범하는 운전자를 쉽게 상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점을 언급했다. 이어 “13초보다 2배 더 길게 약 30초 동안 지속된 이 사건 급발진 과정에는 더 확실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또 “운전자가 가속페달을 브레이크로 착각해 밟았다고 보기 어렵다”는 대전지법의 판단도 A씨 사례에 적용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대전지법은 급발진 의심 차량이 시속 10.5㎞→37.3㎞→45.5㎞→54.1㎞→63.5㎞→68㎞로 가속하는 과정에서 가속페달 변위량이 50% 이하로 계산된 사실을 판단 근거로 삼았다.

원고 측에 따르면 사고 5초 전 속도가 110㎞였던 A씨의 차량은 분당 회전수(RPM)는 5500까지 올랐지만 속도는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이 ‘100% 가속 페달을 밟았다(풀 액셀)’는 국과수의 EDR 검사 결과와 모순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원고 측은 EDR 감정을 통해 급발진을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강릉지원 민사2부는 오는 27일 A씨와 그 가족들이 제조사를 상대로 낸 약 7억6000만원 규모 손해배상 청구 사건의 두 번째 변론기일을 열고, 전문 감정인을 선정할 예정이다.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민사소송의 첫 재판이 5월 23일 오후 춘천지법 강릉지원에서 열렸다. 사진은 전국에서 모인 탄원서 1만7천여부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6일 강릉시 홍제동에서 60대 A씨가 손자를 태우고 운전한 스포츠유틸리티차(SUV)의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해 12살 손자가 숨졌다. 이 사고로 A씨가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돼 지난 3월 경찰조사를 받았다.

A씨 가족은 지난 2월 국회 국민동의 청원에 차량 결함 입증 책임을 제조사가 갖는 이른바 ‘도현이법’ 청원을 냈다. 이후 해당 청원 글에 5만명이 동의하면서 관련법 개정 논의를 위한 발판이 마련됐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회는 “산업계 부담을 고려해야 한다”며 ‘신중검토’ 의견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정헌 기자 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