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그룹, 모스크바 턱밑 회군… 푸틴 리더십 타격

입력 2023-06-25 05:39 수정 2023-06-25 12:53
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오른쪽)이 24일(현지시간)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주의 주도인 로스토프나도누의 남부 군사령부를 떠나면서 현지 주민의 셀피 요청에 응하고 있다. AP연합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 그룹의 무장반란으로 최대 리더십 위기에 직면했다. 바그너 그룹이 모스크바 진입 직전 이를 중단해 내전 위기는 피할 수 있었지만, 푸틴 대통령은 무장 반란을 일으킨 바그너 그룹과 협상하고 처벌 의사도 철회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프랑스, 독일, 영국 정상과 통화하며 사태의 추이를 긴밀히 주시했다.

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오디오 메시지를 통해 병력 철수 지시 사실을 알렸다고 로이터통신이 2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프리고진은 “그들(러시아군 수뇌부)은 바그너 그룹을 해체하려해 우리는 23일 정의의 행진을 시작했다”며 “하루 만에 모스크바에서 거의 200㎞ 내까지 왔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까지는 우리 전사들의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지만, 이제는 피를 흘릴 수 있는 순간이 왔다”며 “한쪽 러시아인의 피를 흘리는 데 따르는 책임을 이해하기 때문에 병력을 되돌려 기지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벨라루스 대통령실도 “푸틴 대통령과 합의 하에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프리고진과 협상했다”며 “양측은 러시아 내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데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또 바그너 그룹 소속 병사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합의가 논의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바그너 그룹은 이 같은 발표 이후 장악했던 로스토프나노두에서 병력을 이동했다. 곧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크렘린궁 대변인은 “프리고진에 대한 형사 입건은 기각되고, 반란을 일으킨 전사들도 기소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바그너 그룹은 이날 러시아 남부 주요 군사 거점인 로스토프나노두 군 사령부를 장악한 뒤 모스크바를 향해 북진했다. 이들은 러시아 국방부가 자신들의 후방 캠프를 미사일로 공격했다며 군 수뇌부 처벌을 요구했다. 푸틴 대통령은 TV 연설에서 “등에 칼이 꽂히는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반역에 직면했다”며 “가담자는 처벌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 정부는 프리고진에 대해 체포령을 내리고 대테러 작전 체제를 발령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반란 초기 제대로 방어선을 지켜내지 못하며 속수무책으로 진격을 허용했다. 바그너 그룹은 하루 만에 1000㎞ 거리를 내달렸다. 곳곳에서 교전이 벌어졌지만, 러시아군은 헬리콥터 6기와 항공관제기 1기 등 항공기 7기를 손실했다. 러시아 매체는 러시아군 15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서남부 보로네시에서는 유류 저장고에서 폭발과 함께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바그너 그룹이 가까이 오면서 모스크바는 초긴장 상태가 지속됐다. 시 당국은 붉은 광장 등을 폐쇄했고, 추가 도로 폐쇄 가능성을 언급하며 주민 통행 자제를 촉구했다. 모스크바 남부 외곽 지역에는 장갑차와 병력이 주둔한 검문소가 설치됐다. 바그너 그룹 진격을 막기 위해 굴착기 등 중장비가 도로를 파헤치는 모습도 포착됐다.


서방도 긴급회의를 열고 사태 추이를 지켜보며 긴밀한 협력을 약속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리시 수낵 영국 총리와 통화를 하고 러시아 용병그룹의 무장 반란 사태에 대해 논의했다. 백악관은 성명을 통해 “이들 정상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흔들림 없는 지지를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오전부터 국가안보팀으로부터 관련 내용을 보고받고 상황 평가에 나섰다. 회의에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 애브릴 헤인스 국가정보국(DNI) 국장, 윌리엄 번스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배석했다. 이들은 러시아 내부 상황이 급박하게 변하면서 일정을 모두 취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블링컨 장관은 이날 캐나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영국 등 주요 7개국(G7) 외교장관 및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와 따로 통화하고 러시아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오스틴 장관도 별도로 캐나다, 프랑스, ​​독일, 폴란드, 영국 국방장관 긴급회의를 진행했다.

미 정보당국은 프리고진이 꽤 오랫동안 러시아군 수뇌부에 대한 주요 반격을 계획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CNN이 3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정보당국은 지난주 초 이미 의회 (상·하원 여야 원내대표 등 지도자 모임인) 8인회에 바그너 그룹의 움직임과 러시아 인근의 장비 증축에 대해 브리핑했다고 한다.

한 소식통은 “프리고진이 무기와 탄약을 모으는 등 반란 움직임에 대해 준비하고 있었다는 징후를 목격했다”며 “우크라이나 작전을 위한 탄약 부족 주장도 군사 반란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고의적인 속임수로 본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는 푸틴 대통령의 리더십에 치명상을 입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푸틴 대통령의 23년 통치 기간 가장 심대한 도전이었다”며 “반란은 푸틴의 권력 장악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러시아 정부와 군대 내부의 긴장을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또 “사기가 크게 저하된 러시아 군대와 달리 의욕적이고 잘 무장된 바그너 그룹의 수장 프리고진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점을 부각한다”고 설명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푸틴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관계로 20년 이상 이익을 얻어 온 프리고진이 충성심의 마지막 조각을 버리고 러시아를 30년 만에 가장 큰 정치적 위기에 빠뜨렸다”며 “1999년 12월 31일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임명된 이후 푸틴 대통령이 이처럼 극적인 도전에 직면한 적은 없었다”고 분석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세계는 러시아의 보스가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목격했다. 완전한 혼돈이었고 예측 가능성의 완전한 부재였다”며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그들에 맞서 단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