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방문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19일 베이징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났다. 미·중 관계가 사상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도 최고위급 소통을 유지하면서 향후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해석된다. 시 주석은 “미·중 양국이 올바르게 공존할 수 있느냐에 인류의 미래와 운명이 걸려 있다”며 관계 정상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시 주석은 이날 인민대회당에서 블링컨 장관을 만나 “지구는 미국과 중국이 각각 발전하고 함께 번영하기에 충분히 크다”며 “각국의 성공은 서로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기회”라고 말했다. 시 주석은 또 “중국은 미국의 이익을 존중하고 미국에 도전하거나 대체하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도 중국을 존중하고 중국의 정당한 권익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양측은 이번 회담을 통해 진전을 이뤘고 몇 가지 구체적인 사안에서 합의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블링컨 장관은 시 주석에게 바이든 대통령의 인사를 전하며 “바이든 대통령은 책임감과 의무감을 갖고 양자 관계를 잘 관리하는 것이 미·중, 나아가 세계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은 신냉전을 추구하지 않고 중국의 체제 변화를 요구하지 않으며 우리의 동맹은 중국을 겨냥하지 않는다”며 “또한 미국은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고 중국과 충돌할 의사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날 회동은 내용 못지않게 자리 배치에서도 눈길을 끌었다. 인민대회당에 마련된 두 개의 긴 테이블 한쪽에 블링컨 장관 일행이, 맞은편에 왕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과 친강 외교부장 등이 앉고 시 주석은 가운데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2018년 6월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미 국무장관이 중국에서 시 주석을 만났을 때 두 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눴다. 시 주석은 약 5년 만에 중국을 찾은 미 국무장관을 예우하되 3연임에 들어간 자신의 위상을 분명히 하고 미국의 강경한 대중 정책에 불만을 표시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시 주석과 블링컨 장관의 면담이 성사된 건 그 자체로 양측 모두 관계개선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는 의미다. 블링컨 장관은 오는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시 주석을 초청한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뜻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를 계기로 미·중 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시 주석과 수개월 내 만나기를 희망한다며 적극적인 메시지를 제스처를 보였다.
블링컨 장관은 시 주석 면담에 앞서 이날 오전 중국 외교라인의 1인자인 왕 위원과 회담했다. 왕 위원은 미·중 관계가 악화된 원인이 미국의 잘못된 대중 인식과 정책에 있다며 중국 위협론에 대한 과장 중단, 불법적이고 일방적인 대중 제재 철회, 중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압박 포기, 내정간섭 중단 등 4가지를 요구했다.
왕 위원은 특히 대만 문제와 관련해 “국가 통일을 수호하는 것은 중국의 핵심이익 중 핵심이고 모든 중화 자녀의 운명이며 공산당의 변함 없는 역사적 사명”이라면서 “중국은 이 문제에 대해 타협하거나 양보할 여지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어 “미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진정으로 준수하고 대만 독립에 명확하게 반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블링컨 장관은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양국 정상이 만나 확정한 의제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과 소통을 강화하고 이견을 통제하며 양측이 이익을 공유하는 분야에서 협력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블링컨 장관과 왕 위원은 지난해 말 왕 위원이 승진하기 전까지 양국 외교수장으로 수차례 협상을 진행했던 인연이 있다. 그러나 회담 시작 전 짧게 공개된 만남 분위기는 다소 냉랭했다. 왕 위원은 이날 회담장 앞에서 블링컨 장관을 맞았다. 전날 친 부장이 회담장이 있는 건물 입구까지 나가 블링컨 장관을 맞이한 것과는 대비된다. 블링컨 장관과 왕 위원은 전날 열린 미·중 외교장관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모두발언 없이 취재진을 퇴장시켰다.
베이징=권지혜 특파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