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가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의학자이자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석호필·1889~1970) 박사 이야기를 전했다.
반크는 16일 공식 블로그를 통해 “올해 5월 내한한 캐나다 주스탱 트뤼도 총리가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스코필드 박사의 묘역에 참배했다”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함께한 스코필드 박사가 21세기 한국과 캐나다를 이어주고 있다. 앞으로도 스코필드처럼 한국과 세계를 잇는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을 알리는 캠페인을 계속 전개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홈페이지, SNS, 블로그 등에 게재된 ‘스코필드 카드뉴스’는 한국어와 영어 각 10장으로 스코필드 박사의 3·1운동 관련 활동과 은퇴 후 한국에서의 활동, 그리고 마지막까지 한국인들에게 3·1운동 역사와 정신을 전했던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스코필드 박사는 영국 태생의 캐나다인으로 토론토대학교에서 수의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목회자였던 아버지와 같이 그리스도를 닮고 싶어하는 기독교인이었다. 1916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세균학 교수로 부임해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돌처럼 굳은 의지로(石) 호랑이처럼 용맹하게(虎) 한국인을 돕겠다(弼)는 의미를 담아 한국식 이름을 석호필(石虎弼)이라 지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민족대표 33인 중 최연소자인 이갑성 남대문교회 집사로부터 1919년 3·1운동 현장을 촬영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행해 3·1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린 이른바 ‘34번째 민족대표’이다. 같은해 4월 일본군이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경기도 화성 제암리와 수촌리에서 주민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학살하자 잿더미가 된 현장으로 달려가 직접 사진을 촬영해 보고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가 작성한 ‘제암리의 대학살 보고서’와 ‘수촌 만행 보고서’는 각각 19년 5월 27일 중국 영자신문 ‘상하이 가제트’와 19년 7월 26일 미국 장로회 기관지 ‘장로교 증인’에 보도돼 일본의 잔학 행위를 세계에 알렸다.
스코필드 박사는 20년 세브란스 근무 계약 기간 만료를 사유로 일제에 의해 추방된다. 그는 해방 후인 58년 국빈 자격으로 돌아와 서울대 수의과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70년 별세한 그의 묘비엔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 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 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주세요”란 유언이 새겨져 있다.
이치만 장신대 역사신학 교수는 “교회가 스코필드 선교사와 같은 위인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며 “당시 선교사들은 말뿐만이 아닌, 행동을 통해 기독교가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복음을 전했다. 교회 역시 이들을 본받아 기독교인으로서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통해 타인을 섬기고 복음이 무엇인지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승현 기자 cho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