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여성의 신체를 불법 촬영한 피의자를 조사하면서 피의자신문조서에 영상 등 증거물의 압수 경위와 취지를 적었다면 압수조서가 없더라도 증거능력이 인정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권)는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촬영)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일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의정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4일 밝혔다.
A씨는 2018년 9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여성들의 신체를 8차례 불법 촬영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피해 여성 B씨의 고소로 수사에 착수한 서울 서대문경찰서는 2019년 1월 A씨를 불러 조사하면서 휴대전화 사진첩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A씨가 건넨 휴대전화 사진첩에는 B씨 외에 다른 피해 여성 2명의 동영상이 있었다. 경찰은 A씨에게 휴대전화를 임의제출하라고 요구했으나 A씨는 이를 거절하고 사진과 동영상 파일만 제출했다. A씨는 이어진 조사에서 범행을 모두 자백했다.
1심은 모든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징역 6개월을 선고했다. 하지만 2심은 1심 형량을 유지하면서도 B씨가 아닌 다른 여성들에 대한 범죄는 무죄라고 판단했다. 사법경찰관이 압수조서를 작성하지 않아 관련 증거가 위법하게 수집됐다고 본 것이다. 형사소송법 등에 따르면 사법경찰관은 임의제출된 증거물을 압수한 경우 압수 경위 등을 구체적으로 적은 압수조서를 작성해야 한다. 다만 경찰청 범죄수사규칙은 피의자신문조서 등에 압수 취지를 기재하면 압수조서를 대신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2심 재판부는 또 “A씨의 임의제출 의사는 B씨가 고소한 범행에 관한 사진에 불과했을 것으로 보인다”며 “추가 범행을 증명하는 사진 또는 동영상 전체에 대해 임의제출 의사를 명시한 것으로는 불확실하다”고 했다.
대법원은 그러나 “피고인의 절차상 권리가 실질적으로 침해됐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압수는 적법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며 2심 판단을 뒤집었다. 대법원은 “사법경찰관에게 압수조서를 작성하도록 하는 것은 사후적으로 압수절차의 적법성을 심사·통제하기 위한 것”이라며 “피의자신문조서 등에 압수 취지를 기재해 갈음할 수 있도록 하더라도 압수절차의 적법성 심사 기능 등에 차이가 없다”고 판시했다.
동영상 제출의 임의성도 충분히 심리되지 않은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A씨가 휴대전화 대신 동영상을 제출한 구체적 경위, 검찰 피의자신문 과정에서 A씨가 동영상 복제를 동의한다는 취지로 진술한 경위 등을 고려해 임의성 여부를 보다 면밀히 살폈어야 한다”며 “임의제출의 임의성에 대한 증명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원심의 판단에는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아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