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지하교회 성도가 보내온 편지 “천국에서라도 꼭...”

입력 2023-06-13 03:30 수정 2023-06-13 03:30
북한의 한 성도가 극동방송에서 전달한 라디오로 방송을 듣고 있는 모습

“이곳(북한)에서도 극동방송 한경은 안아언사(아나운서)님 사랑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많은 생각 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편지 씁니다.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은 간증과 례화(예화)를 (방송으로) 보내주십시오. 간증과 례화는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비록 (북한에) 방송을 듣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을지라도 은밀한 가운데서 청취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희들을 위해 많이 기도해 주십시오. 통일의 그 날 감격적인 상봉을 위해 열심히 기도합시다. 통일이 안되면 천국에서라도 꼭 만납시다.”

1996년 제주극동방송에는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로부터 편지 한통이 도착했다. 손글씨로 빼곡히 적은 두 장의 누런 편지지에는 당국에 발각되면 받게 될 처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극동방송을 통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며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고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가 중국 접경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로부터 전달 받아 직접 제주 극동방송까지 찾아와 전달한 이 편지는 북한 지하교회 성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과 몰래 방송을 들으며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 교회에 큰 위로의 간증이었다.


유일하게 라디오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복음을 접할 수 있는 북학의 지하교회 성도들에게 편지 속 ‘한경은 안아언사(아나운서)’는 북한의 지하 성도들에게 스타였다. 1992년 국민일보에 아세아방송(현 제주극동방송) 방송요원 모집 광고를 보고 응시해 제주지사 공채 1기로 입사한 그는 19년을 제주에서 근무한 후 창원극동방송 방송부장과 극동방송 중앙사 편성국장을 거쳐 다시 제주극동방송 지사장을 엮임 후 2022년 퇴직했다.

지난 9일 제주시 애월읍에서 열린 ‘제주극동방송 개국 50주년 기념예배’에서 한경은 전 제주 지사장을 만났다.

한경은 전 제주 지사장

한 전 지사장은 1996년 하용조 목사로부터 북한 성도의 편지를 받았을 당시를 또렸이 기억했다. 그는 “처음에는 정말 믿기지 않았다. 하용조 목사님이 직접 편지를 들고 찾아와 ‘북한은 극동방송으로 밖에 복음을 들을 수밖에 없다’며 방송 사역을 전적으로 지원해 줬다. 우리에게 너무 특별한 선물이었다”고 말했다.

73년 개국한 제주극동방송은 1만원의 헌금 오병이어가 일어나는 곳이라고 회고했다. 한 전 지사장은 “제주극동방송이 하나님의 은혜로 50주년을 달려오기까지 이름도, 빛도 없이 ‘모퉁이 돌’이 돼준 분들이 많다. 매달 1만원씩 30년간 헌금을 해준 분, 또 시각 장애인으로 안마 일을 하며 오랫동안 헌금을 해준 분 등 고마운 분들이 많다”며 “다른 지사와 달리 제주 송신소는 AM 1566㎑로 북한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국내 민방 최대출력 250㎾ 송출한다. 월 2000만원의 전기료가 들어가는데 1만원의 작은 헌금들이 모아져 운영되는 기적을 이뤄냈다”고 고백했다.

한 전 지사장은 하나님의 눈물이 고여있는 북한 땅을 위해 통일 전문 PD 아나운서들이 세워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드러냈다. 그는 “북한의 영혼들을 위해 실질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준비되면 통일은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 믿는다. 통일에 대한 기대가 없는 이 시대에 북한을 더욱 사랑하고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제주극동방송이 되길 기도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가 극동방송에서 전달한 라디오로 방송을 듣고 있는 모습

1973년 아세아방송으로 시작된 제주극동방송은 미국 데이비드 윌킨슨 선교사와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89) 목사의 희생과 헌신으로 세워졌다.1957년 일본 오키나와에 송신소를 세우고 공산권에 복음을 전해 온 미국의 선교기관 극동방송(FEBC)은 72년 오키나와의 반환을 앞두고 일본 정부의 철수 요청으로 송신소를 제주도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제주도를 선택한 이유는 염분이 있는 바다 근처에 송출 안테나를 세우면 전파가 강해지는 데다 오키나와보다 중국 상하이에 더 가까워진다는 입지 때문이었다.

제주극동방송은 72년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에 3만6000여평 토지를 구입해 송신소를 건립했다. 제주송신소는 설립 후 AM 1566㎑로 (국내 민방 최대출력 250㎾ 송출)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로 방송을 편성해 동북아 18억명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북방선교 전문 방송으로 자리했다.

2001년 10월 1일 아세아방송은 제주극동방송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북방지역 선교방송으로 힘찬 걸음을 내디뎠다. 방송국에는 주님을 영접했거나 신앙생활에 큰 힘을 얻고 있다는 은혜의 간증이 끊이지 않았다.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로부터 온 헌금

“따르르릉…

2012년 6월 제주극동방송은 북한과 인접한 국경에서 사역하는 한 선교사로부터 믿기 어려운 연락을 받았다. 제주극동방송을 청취하는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가 전한 반 년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중국돈 500위안(한화 약 10만원)의 송신기 교체 헌금과, 방송을 들으며 써온 신앙노트를 제주극동방송에 전달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9일 ‘제주극동방송 개국 50주년 기념예배’에서 만난 맹주완 부사장은 제주 지사장(2011~2013)으로 근무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당시 선교사님의 전화를 받고도 북한의 지하 성도가 어떻게 헌금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탈북한 상태에서 헌금한 것은 아닐까?’싶기도 했다. 믿기지 않아 선교사님께 다시 확인했는데 정말 북한의 성도가 보낸 헌금이 맞았다”고 회고했다.

북한의 성도가 헌금을 보내오게 된 사연은 이랬다. 제주극동방송은 2011년 11월 29일 새벽 23년 된 낡은 송신기 교체를 위한 모금 생방송을 실시했다. 이례적으로 새벽 4시에 모금 방송을 한 이유는 주로 그 시간대에 북한과 중국, 일본 등지의 성도들이 라디오를 청취하기 때문이었다. 직접 참여는 못해도 방송을 들으면 기도해 달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실제로 방송 시작 30여 분 뒤 북한을 제외한 중국과 일본 등에서 기도하고 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송신기 교체 준공 예배를 6개월 앞둔 어느날이었다. 제주극동방송에는 북한의 성도로 부터 첫 헌금이 도착했다. 북한에서 송신기 교체 모금 생방송을 들은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가 비밀리에 중국 접경에서 사역하는 한국인 선교사를 통해 전달해 온 것이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맹주완 극동방송 부사장

맹 부사장은 “모금 생방송을 들은 북한 성도가 ‘송신기가 빨리 교체돼야 생생하게 계속 복음 방송을 들을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헌금을 보내준 것으로 확인됐다”며 “성경 속 과부가 드린 두렙 돈 처럼 소중한 헌금이었다. 500위안은 워낙 큰돈이라, 북한의 지하 교회 성도 공동체가 100위안씩 모아 헌금을 마련한 것은 아닐까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 순간 ‘하나님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신 겁니까. 우리가 도와줘도 시원찮은 북한 성도가 송신기 교체를 위해 헌금을 하다니요’라는 고백이 흘러나왔다”고 말했다.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는 헌금과 함께 나무로 만든 십자가와 신앙노트도 함께 보내왔다. ‘조선을 위하여 배우자 학습장’이라고 적힌 노트에는 ‘조선인민의 철천지원쑤인 미제 침략자들을 소멸하라’는 선동 문구도 인쇄돼 있었다.

북한 성도의 믿음과 북한의 참혹한 현실이 낱낱이 기록돼 있는 신앙노트에는 “북한 땅에 있는 우리들을 위해 깨끗한 방송을 들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극동방송은 축복의 방송이며 하나님 은혜의 방송이며 구원의 방송입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방송을 못 들었다. 하나님 죄송해요” “통일이 안돼면 천국에서라도 꼭 만납시다”등 신앙고백이 담긴 내용이 적혀있었다.

북한 지하교회 성도가 송신기 교체를 위해 헌금을 보내온 사연은 ‘주여, 이 땅에 빛을 주소서’(김태희 PD)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2013년 제4회 세계한인기독교방송협회(WCBA) 방송대상에서 라디오 부분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맹 부사장은 송신기 교체를 위해 헌금을 보내온 명단을 제주극동방송 전시관에 새겨뒀다. 가나다순으로 작성된 헌금자 명단자에는 ‘북한성도’도 이름을 올렸다. 이 밖에도 전시관에는 북한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순교한 남편의 뒤를 이어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가고 있는 아내가 복음화를 꿈꾸며 ‘예수님 조선 땅에 오소서 아멘’이라는 글귀와 함께 북한 지도를 수놓은 십자수와 조선족 등의 간증이 담긴 편지들이 전시돼 있다.

맹 부사장은 “우리가 왜 북한을 위해 기도하고 선교에 힘써야 하는지를 보여준 의미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하나님께서 제주 극동방송을 통해 일하시고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남북이 함께하길 원하신다. 앞으로도 동북아시아를 선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