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상주’ 등 5·18 유족들 정신적 손배소서 승소

입력 2023-05-29 11:23 수정 2023-05-29 11:26
1980년 5월 숨진 아버지 조사천씨의 영정사진을 든 꼬마 상주 조천호씨. 연합뉴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총탄에 숨진 피해자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정신적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했다.

광주지법 민사14부(재판장 나경 부장판사)는 5·18 국가폭력 피해자(상속인 포함) 315명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고 29일 밝혔다.

재판부는 “전두환 등 신군부가 헌법 질서 파괴 범죄를 자행하며 저지른 반인권적 행위로 위법성 정도가 중대하고, 고인과 가족들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원고들이 청구한 금액의 41.3~89.3%를 인정했다. 원고들은 판결이 최종 확정되면 최소 810만원에서 최대 1억원의 정신적 피해 배상금(위자료)을 받게 된다.

이번 소송에는 정춘식·전계량 전 5·18유족회장과 가족, 차종수 5·18기념재단 기록진실부장과 가족, 조사천·박금희 열사의 유족 등이 참여했다.

정 전 회장의 동생인 정윤식 열사는 1980년 5월 27일까지 최후 항쟁에 참여했다가 상무대로 연행됐다. 102일간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23살인 1982년 2월 숨졌다.

전 전 회장의 아들인 전영진 열사는 고교 3학년 때 참고서를 사러 가던 중 계엄군에게 붙들려 폭행당했다. 그는 군의 행동이 잘못됐다며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 항쟁에 참여했다가 총에 머리를 맞아 숨졌다. 그가 집을 나서기 이틀 전 어머니에게 “엄마, 조국이 나를 불러요”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1980년 34세였던 조사천 열사는 전 세계에 5·18 아픔을 전한 ‘꼬마 상주’ 사진의 영정 주인공이다. 조 열사는 그 해 5월 21일 항쟁에 참여했다가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당시 다섯 살이던 아들 천호군이 아버지의 영정 위에 턱을 괸 사진이 외신에 보도되면서 5·18을 상징하는 사진 중 하나가 됐다.

박금희 열사는 고3 때인 1980년 5월 21일 “피가 부족해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차량 방송을 듣고 헌혈한 뒤 버스로 귀가하던 중 계엄군 총탄에 희생됐다.

재판부는 국가기관에 의해 자행된 반인권적 행위라는 이 사건 불법 행위의 중대성, 인권 침해 행위 재발 방지 필요성, 피해자와 유족의 고통, 43년간 배상이 지연된 점 등을 두루 고려해 각각 위자료를 정했다고 설명했다.

김용권 기자 y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