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위 임산부, 경찰의 외면?…최선은 [국민적관심사]

입력 2023-05-27 00:05 수정 2023-05-27 00:05
출산 임박 임신부의 남편이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던 상황. SBS 보도화면 캡처

도로 위 달리는 차 안에서 진통을 겪는 산모가 경찰에게 호송 도움을 요청하는 건 부당한 요구일까.

지난 11일 부산에서 출산이 임박한 산모를 차에 태우고 산부인과로 향하던 보호자가 경찰에 산부인과 호송 요청을 했으나 “관할 지역이 아니다” “119에 요청하라”는 이유로 두 차례 거절당했다는 내용의 방송 보도가 지난 22일 전파를 탔다.

이 같은 소식에 “응급 상황에선 경찰도 도왔어야 한다” “관할을 따지는 건 너무하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그런데 직장인 온라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 경찰청 게시판에 ‘임산부 경찰차 에스코트 그만하겠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온 후 여론 방향은 돌변했다.

직장인 익명 온라인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 블라인드 캡처

익명의 경찰관은 이 게시글에서 “(당시 산모가 호송을 요청한 곳은) 1시간 넘게 걸리는 상습 정체구역이었다”면서 “이동하다 정작 내가 맡은 구역에서 강력 사건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특히 산모가 평소에 다니던 병원을 가고 싶어서 119를 부르지 않고 막히는 길을 가다가 경찰에 무리한 에스코트를 요구했다는 취지로 비난했다.

이후 경찰을 향하던 비판의 화살이 보호자와 산모로 향하기 시작했다. 일부 커뮤니티와 유튜브 등에선 누리꾼들이 해당 시민의 신상까지 무분별하게 공개하는 등 과도한 ‘신상털이’까지 전개되고 있다.

응급환자 이송은 ‘119’...경찰은 현장 판단에 따라

순찰차 이미지. 기사와직접관련없음. 게티이미지뱅크

이 같은 비난은 정당할까. 지나치게 과열된 논쟁 속에 묻힌 ‘응급 상황 시 경찰의 업무 범위’부터 확인해 봤다.

26일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119법 등 현행법은 응급 상황에서 환자 이송은 119 구급대 업무로 명시돼 있다. ‘경찰은 범죄·긴급신고 112’이며 응급 구조 능력도 장비도 없는 조직이라는 블라인드 글 주장이 틀린 얘긴 아닌 셈이다.

다만 경찰 직무집행법 제 4조 보호조치 규정은 경찰은 ‘응급 구호가 필요하다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사람(구호대상자)을 발견했을 때 공공구호기관에 긴급 구호를 요청하거나 경찰관서에서 보호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경찰도 현장 판단에 따라 응급 상황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다만 그 대응이 어떤 것이 될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많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경찰관 직무집행법에 응급조치에 관한 포괄적인 조항을 명시해 두고 있기 때문에 응급 상황에서 재량권이 발동된다”며 “정서적으로 응급 환자는 경찰이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지만, 일의 우선순위가 있으므로 경찰은 상황별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도 “119가 먼저고 112는 보조적이다. 경찰 해명이 틀린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경찰 매뉴얼은 포괄적이라 ‘도로의 경찰관’이라고 불리는 일선 경찰들의 자율적이고 임의적인 판단이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번 사건에서 호송 요청을 받았던 경찰은 현장에서 교통 단속 중이었다. 본 업무가 우선이라고 볼 때 호송 요청을 거절하고 119를 안내한 경찰의 대응이 잘못됐다고 할 수 없지만, 재량적 판단으로 호송을 도울 여지도 있었다는 말이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이번 사안은 흑백을 나눌 수 없다. 다만, 담당 지역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면 119에 직접 연결해주는 등 조금 더 적극적이고 융통성 있는 조치를 했다면 어땠을까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응급’ 판단 어려웠고…정해진 산부인과 찾는 경향도 강해

그렇다면 산모와 보호자는 왜 119를 부르지 않았을까. ‘근처 응급실이 아닌 35㎞ 떨어진 산부인과를 고집하느라’ 경찰에 에스코트를 요청했다는 식의 비난은 사실일까.

이를 판단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당시 산모의 상태다. 산모 A씨는 사건 당일 병원으로 향하던 부산 강서구의 한 도로 위에서 경미한 진통을 호소했다. 진통은 오락가락했고, 출산 예정일도 5일 남아 있는 때였다.

A씨 부부가 목적지인 병원까지 이동한 경로. 카카오맵 캡쳐

A씨의 남편은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그 날 애를 진짜 낳을 줄 몰랐다. 병원 진찰을 받으려고 가고 있는데, (아내가) 갑자기 경미한 통증을 호소했다”며 “처음에는 응급실 갈 정도가 아니라서 119를 부르지 않았는데 길이 막히는 동안 진통이 심해져서 눈앞에 보이던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블라인드 글에서는 이들이 가려던 병원까지 1시간 넘게 걸릴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 소요시간은 33분가량 정도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월20일 부산 서부와 동부를 잇는 장평지하차도 개통으로 이동시간이 단축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산모 A씨는 임신중독증 고위험군 산모로 약을 복용 중이었기 때문에 산모의 상태를 잘 모르는 병원에서 아이를 낳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문가들은 응급 상황에선 즉시 119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맞다고 조언하면서도, 보통 진료받던 산부인과에서 출산하려는 게 일반적이라고 설명했다.

정재원 대한의사협회 정책이사는 “태아와 산모의 상태는 담당 의사가 아니면 잘 모를 수도 있다. 산전 진찰을 받았던 산부인과로 가려는 게 일반적”이라고 설명했다. 홍순철 고려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도 “보통 보호자와 산모는 산전 진찰하면서 시설과 의료진이 익숙해지기 때문에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있는 병원을 찾기 마련이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이번 사안처럼 산모가 병원을 가는 길에 응급 상황에 처하는 일이 많아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낮은 출산율 속에 산부인과가 감소하면서 임산부의 ‘분만 의료 접근권’이 떨어지는 지역이 많아지고 있어서다.

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2021년 기준 250개 시군구 가운데 분만취약지는 42%(105개)에 달했다. 분만취약지는 분만 가능한 의료기관에 60분 내 도달하기 어려운 가임여성 인구 비율이 30% 이상인 지역이면서, 60분 내 분만 의료 이용률이 30% 미만인 시군구를 뜻한다. 홍 교수는 “최근엔 대도시에 있는 산부인과까지 줄어들고 있다”며 “분만취약지에서만 나타나던 현상이 대도시에서도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 이번 사건이 일어난 부산에서도 분만 가능한 산부인과 수는 지난 10년간 계속 감소해 왔다. 부산시에 따르면 현재 부산 내 분만 가능 의료기관은 대학병원 5곳을 포함, 27곳에 불과하다. 부산 중구·영도구·남구·사상구에는 분만할 수 있는 산부인과가 없다. 갑작스러운 산모의 산통, 도로 정체 등이 맞물리면 A씨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는 것이다.

산모 향한 과도한 비난…거짓 정보까지 퍼져

다행히 A씨 부부는 광안대교에서 교통 단속을 하던 경찰에게 세 번째 호송 요청을 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병원에 도착해 건강히 아이를 출산했다. 그러나 이번 사안을 놓고 일부 커뮤니티와 유튜브 채널 등에서 보호자와 산모를 향한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고 거짓 정보까지 확산되면서 정신적인 피해를 겪고 있다.

댓글을 통해 A씨 남편 신원이 유포되면서 그가 운영하는 회사 웹사이트가 다운되는가 하면 태어난 아기를 향한 악의적 댓글까지 쏟아지고 있다.

산모가 산부인과와 연계된 최고급 산후조리원을 이용하고 싶어 일부러 응급실을 가지 않았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부부는 산후조리원을 가지 않고 집에서 아기를 돌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A씨 남편은 “애초에 도움을 준 경찰관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칭찬하고 싶어 제보한 것인데 경찰의 허술한 대응으로 산모와 태아가 위험할 수 있었다는 취지의 내용으로 보도됐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는 “과도한 비난 속에 아내는 신경쇠약이 와서 아이를 잘 돌보기도 힘든 상황”이라면서 “무분별한 명예훼손 댓글은 고소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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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민 이정헌 기자 river@kmib.co.kr 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