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韓紙)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나라 전통 종이다. 중국의 선지(宣紙), 일본의 화지(和紙)에 비해 부드럽고 질기며 보존성이 뛰어나다.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두루마리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700년대 초반에 제작된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데 13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원형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적힌 글자가 여전히 선명하다. 한지가 ‘천년의 종이’로 불리는 이유다. 후기신라시대의 백지 묵서 대방광불화엄경, 고려시대의 팔만대장경 목판 인쇄물, 조선시대의 훈민정음·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등 많은 기록유산들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한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중국의 옛 기록물에서 고려지(高麗紙)의 우수성을 예찬하는 글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고반여사’에는 “고려 종이는 비단같이 희고 질기며, 글을 쓰면 먹이 잘 먹어 좋은데 이것은 중국에 없는 것으로 진품”이라고 기술됐을 정도다. 한지의 품질이 우수한 것은 중국, 일본과 달리 닥나무만을 원료로 사용했고 껍질을 벗겨 닥섬유질을 그래도 유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지는 오늘날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선지는 2009년, 일본의 화지는 2014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지만 한지는 뒤늦게 등재를 추진하는 중이다. 한지가 최고 수준의 품질을 갖고 있는데도 세계에서 선지나 화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뭘까.
최근 발간된 ‘세계 최고의 종이, 한지-정책이 필요하다’(도서출판 선)는 이에 대한 의문을 풀고 위기에 빠진 한지 육성의 해법을 모색한 책이다. 저자는 박후근 경북도인재개발원 원장. 2013년 국가기록원에 근무할 당시 한지 산업의 열악한 현실을 접하고 ‘기록용한지 연구모임’을 만들어 본격 활동한 이후 7년의 연구 결과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저자의 지난해 12월 박사학위 논문을 토대로 펴낸 책에는 한지 연구 동향, 한지 산업의 실태, 한지 정책의 문제점 및 대안 등이 풍부한 자료와 함께 제시돼 있다. 전국의 한지 현장을 두루 찾아다니고, 관련 업무도 수행하면서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쓴 책이라 내용이 구체적이고 탄탄하다.
1996년 64개이던 전통한지 업체가 2021년 19개로 쪼그라든 것은 열악한 우리 한지 산업의 현주소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2017년 1월부터 2021년 상반기까지 한지 부문에 총 341억원의 국보보조금과 지방비가 집행했는데 19개 한지 업체에 대한 재정지원이나 한지 구매 비용은 7억원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은 왜 한지 산업이 낙후됐는지를 짐작케 한다. 창덕궁 등 4대 궁궐 건물의 창호지조차도 일부만 전통한지를 쓰는 상황에서 한지의 세계화란 구호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 한지에 관한 개별법이 없고 정부 차원에서 한지에 대한 정의가 정립되지 않았고, KS(한국산업규격)의 한지품질규격에 등록한 업체가 한 곳도 없는 현실은 한지 정책이 걸음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저자는 이런 현실을 고발하면서 전통한지 육성을 위한 정책 대안을 제시한다. 전통한지의 정의를 새롭게 정립하고 이를 토대로 기초 통계 조사 실시, 전통한지 품질의 표준화와 품질 개선 도모, 공공부문에서 전통한지 사용처를 확대하고 국고보조금의 일정 부분을 구입비로 쓰도록 하는 등 수요 창출, 전통한지 진흥을 위한 범정부적 협업 강화 등이 그것이다.
박 원장은 “지금은 한지 정책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명맥이 끊겨가고 있는 전통한지 산업을 되살려내는 데 이 책이 조금이나 보탬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책에는 전통한지에 그림을 그려온 김호석 화백의 수묵화 9점이 실려 있다.
라동철 논설위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