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미 박사의 성경 속 이야기/거듭나지 아니하면

입력 2023-05-25 11:03
이정미 박사

‘레테’(lethe)는 그리스 신화 속 망각의 강이다. 망자가 저승에 가서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잊기 위해 레테의 강물을 한 모금 마신다고 한다. 그런데 ‘레테’라는 단어에 부정 접두사 ‘a’가 붙으면 ‘진리’(알레테이아: aletheia)를 가리킨다. 명사인 ‘lethargy’(기면 혹 혼수) 역시 ‘lethe’(망각)에서 파생됐다. 이런 맥락에서 진리란 망각에서 기억으로, 은폐에서 드러냄을 뜻한다. 한 마디로 진리는 늘 깨어있는 눈을 가진 자가 발견할 수 있는 실상이 아닐까.

본문은 ‘중생’에 대한 가르침이다. 요한이 주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기술하기 전, 이것을 예시해주는 도입부가 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요 2:24) 그 분은 표적을 보고 당신에게 나아오는 사람을 그리 신뢰하지 않으신다. 사람의 속마음을 환히 들여다보시기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이자 당시 최고 종교의회인 산헤드린(Sanhedrin)을 대표하는 71인 중 한 명이다. 그는 주님을 ‘랍비’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종교적으로 경건한 자인 동시에 영적 진리에 목마른 심정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근데 그가 어두운 밤에 은밀히 주님을 찾아와서 말하길,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그는 자신의 의견을 표현함에 있어 ‘우리’라는 복수형을 사용해 다른 사람들의 견해 뒤에 숨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고도 악한 영들이 얼마든지 사람들을 미혹된 길에 빠져들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애굽의 술객들도 모세의 기적을 흉내내지 않았던가.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 역시 주님을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구약의 선지자들 중 한 분으로 간주하면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율법학자로서 영적통찰력이 결핍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주님의 첫 번째 설교가 ‘거듭남’이란 사실에 대해 매우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소위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중생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항상 시간제약에 상관없이 당신을 절박하게 찾는 죄인을 기꺼이 만나주신다.

주님은 니고데모의 말은 접어두고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여기서 ‘거듭남’이란 ‘다시(처음부터), 위로부터 태어난다.’(겐네데 아노덴)를 뜻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의 변화가 전혀 아니다. 주님은 연달아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라고 가르치신다. 위로부터의 출생은 하나님 은혜와 능력에 의해 새로운 영적(신적) 본질이 전달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거듭남은 마치 여성의 자궁이 새 생명을 품듯, 성령의 출산이 새 피조물을 낳는 오묘한 역사인 것이다. 요컨대 겉(육)사람의 정화가 아닌, 속(영)사람의 창조이다.

그렇다면 중생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은 무엇인가? 니고데모가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 3:4)라고 질문했을 때 주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대답하셨다. 여기서 ‘물’은 ‘말씀’을 가리키는 상징적 의미이다. 예를 들어 야고보 사도는 “그가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야 1:18)고 했으며, 베드로 사도 역시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고 선언한다. 곧 말씀 없이 참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성령은 그 말씀을 통해 그 분이 살리시고자 하는 사람의 영혼과 양심 위에 인격적으로 역사하신다.

성경은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 우리가 꿰뚫어 볼 수 없다고 말한다.(전 11:5) 죄와 인생의 허무 가운데 죽어있는 우리를 살리시는 성령은 마치 자유로운 바람과도 같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우리는 비와 눈과 번갯불을 볼 수 있지만 바람은 볼 수 없다. 그 분의 인격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바람은 불가사의하다. 바람의 기원과 성질 및 활동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다. 성령의 일하심도 그렇지 않은가. 때론 바람은 불규칙하다. 여린 나뭇 잎새에 부드럽게 불기도 하지만 거센 폭풍은 한 그루 나무를 쓰러뜨리기도 한다.

성령은 오늘 한두 사람의 마음 속, 한 줄기 미풍처럼 스며들지만 내일은 오순절의 그 날처럼 세차게 부는 강풍으로 온 무리의 심령을 찌르실지도 모른다. 바람은 아무 때나,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분다. 성령도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바람은 자연에 대한 자정 능력을 갖고 있다. 성령께서도 우리의 영혼과 양심을 일깨우신다. 무엇보다 바람은 생명의 기운을 북돋아준다. 그 분은 우리 속사람을 소생, 회복시키시고 생기(활기) 있는 힘을 불어 넣어주신다. 성령 없이 영적 생명력이 결코 있을 수 없다. 거듭난 사람은 그가 새 생명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고 그 증거(소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활동은 신비한 베일 속에 감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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