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디or보기]“스코어 잘 나오게 코스 세팅 쉬워야”…회장님의 위험한 발상

입력 2023-05-25 06:28
KPGA 구자철 회장은 코리안투어가 인기를 끌기 위해선 코스 세팅을 쉽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구 회장이 대회장에서 강경남을 격려하고 있다. KPGA

투어가 팬들로부터 인기를 얻기까지는 여러 요인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스타 플레이어의 출현이라는 것에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올 들어 국내 남여프로골프투어서 가장 ‘핫’한 선수는 정찬민(24)과 방신실(19)이다. 둘다 국내 선수로는 드물게 초장타를 날린다는 게 팬들을 매료시키는 포인트다.

만약 이들이 거리만 멀리 보내는 선수들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인기’가 아닌 일시적 ‘관심’에 그쳤을 것이다. 다행히도 둘은 자신들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주는 다른 퍼포먼스 능력도 갖고 있다.

스타는 이들처럼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자신의 주특기에다 그 재능을 극대화시키는 다른 능력을 장착, 어떤 코스 세팅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꾸준히 우승 경쟁을 하는 선수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KPGA구자철 회장이 최근 페이스북(이하 페북)에 올린 글이 파장이다. 요지는 남자 골프가 팬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선 스타 플레이어가 나와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까지는 보편적인 견해와 다를 바 없다.

문제는 해법이다. 그는 페북에서 “일단 국내 대회가 인기를 얻으려면 재미나야 한다는 게 내 믿음. 맨날 해저드에서 헤매는 모습. 튕겨나가는 쇼트 홀 세팅. 공도 안보이는 깊은 러프”라고 적었다.

한 마디로 코스를 쉽게 세팅해 선수들이 좋은 스코어를 내도록 해야 한다는 견해다. 바꿔 말하면 팬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선 코스 변별력은 아예 염두에 둘 필요도 없다는 주장인 것이다.

구 회장은 협회장으로서 지극히 공적이어야 할 견해를 아무 여과없이 사적 공간인 개인 SNS에다 밝히면서 수 차례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연초 기자 간담회에서 그에 대한 지적을 받고 자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공수표다.

모든 프로 대회 코스 세팅은 전적으로 경기위원회가 결정한다. 더러는 주최측 또는 골프장의 의사가 반영되긴 하지만 극히 제한적이다.

협회장이 이러쿵 저러쿵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대회 마다 코스 세팅을 쉽게하라고 경기위원회에 압력을 가한다. 마치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사법부의 판단에 개입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고 경기위원회가 회장의 압력에 굴복한 적은 없다.

구 회장은 지난 21일 끝난 SK텔레콤 오픈 때 페북에다 “최경주프로를 오랜만에 만났다”면서 “최프로께서 ‘세계 무대서 경쟁하려면 (코스 세팅)을 어렵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씀 하시나 미국 등은 이미 남자 인기가 엄청 높은 팬 문화가 정착되어 있는 곳이고”라고 썼다.

미국은 이미 인기가 있으니까 코스 세팅을 어렵게 해도 되지만 우리는 인기가 없으니 쉽게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읽혀지는 대목이다.

참고로 최경주는 SK텔레콤 오픈 공동집행위원장으로 경기위원회에 코스 세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적극 반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 회장은 한 술 더떠 코스 세팅을 어렵게 하는 건 선수들을 ‘생고생’ 시키는 것이라고도 했다. 시니어투어 진출이 얼마 남지 않은 일부 노장 선수들의 불평불만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동호회 골프 회장이나 할 법한 발언이 프로골프 협회장한테서 나왔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누군가는 얘기한다. ‘지극히 아마추어적 발상으로 어쩌면 협회장이 투어를 자신의 놀이터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고.

구 회장은 또 “박민지 선수의 인터뷰를 보면 왜 국내 여자골퍼들이 항상 멋진 샷을 보여주는지 쬐끔 이해가 갈듯 하다”고 적었다. 뜬금없이 박민지를 소환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박민지의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포스팅했다. “한국에서는 샷과 퍼팅만 잘하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미국은 잔디도 다르고 쇼트 게임 등 부족한 게 많이 느껴져서 한 번씩 다녀와야 경각심을 스스로 심어줄 수 있는 것 같다.”

이 정도면 심각한 난독증이다. 박민지의 인터뷰 내용 중 어디에도 코스 세팅을 쉽게 해야 한다는 대목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기 위해선 미국 대회에 다녀와야만 경각심이 생겨 더 열심히 하게 된다는 게 골자다.

우리나라 남자 골프에 스타가 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차고 넘친다. PGA투어서 통산 8승을 거둬 아시아 국가 출신으로는 최다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최경주와 아시안 최초의 메이저 챔프 양용은을 필두로 많은 ‘코리안 브라더스’가 PGA투어서 활동중이다.

김주형, 임성재, 이경훈, 김시우, 김성현, 안병훈, 강성훈, 노승열, 배상문 등 9명(조건부 시드 포함)이나 된다. 미국을 제외하곤 11명의 영국 다음으로 많은 PGA멤버를 보유한 국가다. 그 다음이 골프 강국인 호주와 캐나다로 8명씩이다.

정확히 얘기 하자면 한국 남자 골프는 스타가 없는 게 아니라 인기가 없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남자 골프가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솔루션이 구 회장의 말처럼 쉬운 코스 세팅이 결코 되어선 안된다. 그런 꼼수보다는 스타 플레이어들을 잘 활용해 남자 골프의 르네상스를 한 시라도 빨리 앞당기는 대책 마련에 골몰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정대균 골프선임기자 golf56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