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변함없이 다수의 셰익스피어 작품들이 국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올 초 셰익스피어(1564~1616)의 젊은 시절 사랑을 그린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2개월간 공연돼 인기몰이한 데 이어 엔데믹과 함께 중대형 극장에 셰익스피어 작품이 빈번하게 오르는 덕분에 유난히 ‘셰익스피어 열풍’이 뜨겁게 느껴진다.
‘오셀로’ ‘리어’ ‘한여름밤의 꿈’ 등 잇따라
예술의전당은 올해 전관 개관 30주년을 맞아 토월정통연극 시리즈를 4년 만에 부활시키면서 ‘오셀로’를 무대에 올렸다. 지난 12일 개막해 6월 4일까지 공연되는 ‘오셀로’는 1000석 규모 CJ토월극장의 높이와 깊이를 최대한 활용한 벙커 콘셉트 무대 위에 의상과 조명 등에 현대적 감각을 더했다. 배우 박호산과 유태웅이 오셀로를 번갈아 가며 맡아 광기 어린 욕망과 질투 속에 추락하는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국내에서 현역 최고령 배우인 이순재(89)가 지난 2021년 타이틀롤을 맡아 열연을 펼쳤던 ‘리어왕’도 돌아온다. 6월 1~18일 1300석의 LG아트센터 서울 무대에 오르는 ‘리어왕’은 최근 셰익스피어 연극이 대부분 현대적으로 각색되는 것과 달리 원전에 충실하다. 초연 당시 CJ토월극장에서 23회차 공연을 전석 매진시켰던 이순재는 이번에 ‘최고령 리어왕’이라는 기네스북 기록에 도전할 예정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가운데 가장 인기있는 ‘한여름밤의 꿈’도 서울과 부산의 야외 대형무대에 잇따라 오른다. 먼저 연세대 연극인 모임인 연세극예술연구회가 창립 70주년을 기념해 7500석 규모의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26~28일 선보인다. 56학번 동문부터 23학번 새내기 재학생까지 70여 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회원들이 오른다. 연세극예술연구회는 1985년 연세대 창립 100주년 기념으로도 ‘한여름밤의 꿈’을 공연, 당시 한국 연극 사상 단일공연 최다 관객 기록을 경신하며 동아연극상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극단 사다리움직임연구소는 올해 20주년을 맞은 부산국제연극제 개막작으로 800석 규모의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에서 6월 9~10일 ‘한여름밤의 꿈’을 선보인다. 이번 작품은 한국의 봉산탈춤과 16~18세기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희극 양식인 ‘코메디아 델아르떼’를 토대로 재탄생시켰다.
대구시립극단은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인 ‘템페스트’를 6월 2~3일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에서 공연한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 마법이 펼쳐지는 신비한 외딴섬을 무대·영상·조명·특수효과 등으로 무대에 구현할 예정이다. 1000석 규모의 극장인 만큼 볼거리 많은 스펙터클한 무대를 구현할 예정이다.
오페라·창극·발레·뮤지컬로도 선보여
소극장에서도 셰익스피어 연극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5~6월만 보더라도 ‘이아고, into the evil’(17~28일 극장 동국)와 ‘플레이위드 햄릿’(6월 23일~7월 9일 산울림 소극장) 등이 잇따라 관객을 찾는다. 이들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셰익스피어는 원작인 ‘오셀로’와 ‘햄릿’을 각각 재창작한 것이 특징이다. ‘이아고, into the evil’는 오셀로가 아닌 이아고를 중심으로 드라마를 전개하면서 결말까지 바꾸는가 하면 ‘플레이위드 햄릿’에는 네 명의 배우가 무대에서 서로 다른 햄릿을 연기한다.
셰익스피어 전문가인 이현우 순천향대 교수는 “국내에서 셰익스피어 열풍은 올해만의 특수한 현상은 아니다. 1990년 이후 지금까지 대략 800편 정도가 올라갔을 정도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도 셰익스피어 열기는 계속됐는데, 외국과 비교해 극장이 계속 문을 열었기 때문에 어떤 나라보다도 공연이 많이 올라갔다”면서 “다만 팬데믹이 끝나 공연 중단이나 취소에 대한 부담이 없어지자 대극장 연극이 많이 기획되는 것은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셰익스피어는 다양한 장르로도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국립창극단은 6월 8~11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베니스의 상인’을 우리 고유 언어와 소리로 풀어낸 창극으로 선보인다. 김은성 작가, 이성열 연출가, 한승석 작창가, 원일 음악감독 등 스타 창작진의 조합으로 일찌감치 주목을 받고 있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돈을 빌리러온 상인 안토니오에게 가슴살 1파운드를 담보로 거는 것으로 유명한 원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 유대인 혐오와 인종적 편견 등 시대와 맞지 않는 부분을 덜어냈다. 오는 10월엔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발레단이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 안무 ‘로미오와 줄리엣’을 가지고 내한한다. 이밖에도 서울시뮤지컬단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뮤지컬을 12월 선보인다. 앞서 지난달에 국립오페라단도 셰익스피어를 토대로 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 ‘맥베스’를 선보인 바 있다.
동시대적 의미… 다양한 해석과 재창작 가능
셰익스피어가 죽은 지 4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작품이 계속 공연되는 이유는 뭘까. ‘모든 시대에 속한 작가’라는 수식어에서 알 수 있듯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여전히 동시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다. 37편에 달하는 셰익스피어 희곡들은 삶을 꿰뚫는 통찰력으로 지금도 대중의 공감을 얻어내고 있다. 여기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다양한 해석과 재창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후대 예술가들에게 강렬한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매일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다양하게 변주돼 무대에 오르고 있다.
게다가 올해가 한국의 셰익스피어 수용사와 관련해 의미있는 해라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바로 1923년 극작가 겸 연출가였던 현철이 ‘하믈레트’(햄릿)를 완역 출판함으로써 셰익스피어 작품의 첫 완역 출판이라는 기록을 남긴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국내에 처음 알려진 것은 20세기 초로 영국의 위인 정도로 소개됐다. 이어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국내에 온전하게 소개된 것은 1917년 무성영화 ‘마구베스’(맥베스)가 처음이다. 이어 1920년대 영국 수필가 찰스 램이 아이들을 위해 소설처럼 풀어쓴 ‘셰익스피어 이야기’가 국내에 번역돼 인기를 얻으면서 대중들은 점차 셰익스피어를 친근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극예술연구회를 중심으로 본격 근대극 운동이 전개되는 1930년대가 되면 셰익스피어에 관심을 가지는 연극인들도 많이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이 제대로 무대화되는 것은 해방 이후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지만, 1951년 대구에서 이해랑 연출로 ‘햄릿’의 전막 공연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리고 연극계는 물론 학계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 번역과 비평을 시작하면서 1963년 셰익스피어 학회의 설립으로 이어지게 됐다. 올해는 셰익스피어 학회가 60주년이 되는 해로 하반기에는 대규모 심포지엄 등도 열릴 예정이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