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 손자 사망한 급발진 의심 사고, 할머니의 오열

입력 2023-05-24 06:26 수정 2023-05-24 09:50
지난해 12월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의 한 도로에서 60대 여성이 운전하던 SUV 차량이 굉음과 연기를 내며 600m가량 질주하다 지하통로로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KBS 보도화면 캡처

지난해 12월 강원 강릉에서 발생한 급발진 의심 사고의 책임 소재를 가릴 민사소송의 첫 재판이 5개월 만에 시작됐다. 이 사고로 12살 손자가 숨졌고, 운전대를 잡았던 68세 할머니는 “누가 일부러 사고를 내 손자를 잃겠느냐”며 급발진 사고라고 주장하며 오열했다.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 민사2부는 23일 급발진 의심 사고 차량 운전자와 가족들이 제조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의 첫 변론기일을 진행했다. 앞서 유족들은 “자동차의 결함으로 발생한 급발진 사고였다”며 지난 1월 10일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사고 차량 제조사인 쌍용자동차 측에 손해배상액 7억6000만원을 청구했다.

지난해 12월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의 한 도로에서 60대 여성이 운전하던 SUV 차량이 굉음과 연기를 내며 600m가량 질주하다 지하통로로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KBS 보도화면 캡처

이번 사고로 숨진 아이의 할머니인 운전자 A씨는 “사랑하는 손자를 잃고 저만 살아남아서 미안하고 가슴이 미어진다”며 “누가 일부러 사고를 내 손자를 잃겠느냐. 제 과실로 사고를 냈다는 누명을 쓰고는 죄책감에 살아갈 수 없다”고 울먹였다. 이어 “손자는 변호사를 꿈꾸며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였다”며 “재판장님께서 진실을 밝혀주시길 간절히 바란다”고 호소했다.

숨진 아이의 아버지 이상훈씨는 호소문을 통해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겨온 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자동차 급발진 사고라고 생각한다. 급발진 사고의 원인을 전적으로 운전자에게 입증케 하는 자체가 모순된 행위이며 폭력이다. 언제까지 제조사의 이권과 횡포 앞에 국민의 소중한 생명의 가치가 도외시돼야 하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에서 급발진 사고는 가정파괴범이자 연쇄살인범이다. 부디 이번 사고의 원인을 철저히 규명해 주시고 대한민국은 옳은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사회라는 것을 국민 모두에게 알려주시기를 부탁드린다”며 “이번 소송이 급발진 사고에서 승소한 첫 사례가 돼 다시는 제조사가 방관하고 묵과하지 않도록 법 개정이 반드시 이뤄질 수 있도록 국회의원분들께도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민사소송의 첫 재판이 23일 오후 춘천지법 강릉지원에서 열렸다. 사진은 전국에서 모인 탄원서 1만7000여부 모습. 연합뉴스

유족 측은 이날 재판부에 사고의 정확한 원인 규명을 요청하는 1만7500부의 탄원서도 제출했다.

해당 사고는 지난해 12월 6일 오후 4시쯤 강릉시 홍제동의 한 도로에서 발생했다. A씨가 몰던 SUV 승용차가 도로 옆 지하통로에 빠지면서 함께 타고 있던 손자(12)가 목숨을 잃었다. 이 사고로 A씨는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됐다.

지난해 12월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의 한 도로에서 60대 여성이 운전하던 SUV 차량이 굉음과 연기를 내며 600m가량 질주하다 지하통로로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KBS 보도화면 캡처

원고 측은 처음부터 차량의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 사고였다고 주장했다. 원고 측 소송대리를 맡은 하종선 변호사는 “이 사건은 급발진의 전형적인 4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다. ‘웽’하는 굉음과 머플러(소음기)에서 흘러나온 액체, 도로상 타이어 자국과 흰 연기가 있고, 블랙박스 동영상에는 오작동 차량의 결함이 있음을 나타내는 운전자의 생생한 음성들이 녹음돼 있다”며 “약 30초가량 가속 페달 오조작 가능성에 대해서는 인체공학적 분석과 경험칙에 반한다”고 설명했다.

피고 측 소송대리인은 “사건 대리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국과수의 사고 원인 조사 결과를 충분히 확인 후 상세한 반박을 하겠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 측에 “소장을 1월에 접수한 점과 3월에 변론기일을 통지했던 점을 들어 신속히 대응하지 않은 측면이 있어 이로 인한 불이익은 감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원고 측이 제출한 사고기록장치(EDR), 음향분석 감정신청을 모두 받아들였다. 사고 5초 전 차량의 속도가 110㎞인 상태에서 분당 회전수(RPM)가 5500까지 올랐으나 ‘속도가 거의 증가하지 않은’ 사실과 ‘가속 페달을 밟았다’는 국과수의 EDR 검사 결과가 모순되는 점을 통해 EDR의 신뢰성 상실을 증명하기 위해 감정을 신청했다.

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