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미국 반도체기업 마이크론 제재를 단행하면서 미·중 반도체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중국의 결정은 미국 조치에 대한 보복 성격으로, 7개국(G7) 정상회담 마지막 날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미국이 G7과 함께 추진한 ‘경제적 강압 공동 대응’이 출발부터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국가 안보를 놓고 미·중이 벌이는 반도체 갈등이 심화 조짐을 보이면서 업계 불확실성이 확대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1일(현지시간) “마이크론 제재는 핵심 기술에 대한 중국 접근을 억제하려는 미국 노력에 대한 보복”이라며 “마이크론의 기술은 경쟁업체인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칩으로 쉽게 대체될 수 있어서 중국의 명백한 첫 번째 표적이 됐다”고 전문가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앞서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 산하 인터넷안보심사판공실(CAC)은 전날 “마이크론 제품에는 비교적 심각한 네트워크 보안 문제가 존재해 중국의 핵심 정보 인프라 공급망에 중대한 안보 위험을 초래한다”며 “법률에 따라 중요한 정보 시설 운영자는 마이크론 제품 구매를 중지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산제이 메로트라 마이크론 최고경영자(CEO)는 G7 정상회담 비즈니스 리더 대표단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 같은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한 소식통은 “중국은 일요일 회의를 열고 마이크론에 결정을 알렸다. 마이크론은 회의 소집 전까지 CAC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FT에 말했다. G7 정상회담 공동성명을 직접 겨냥한 전격적 발표였던 셈이다.
중국은 마이크론의 어떤 칩을 제재 대상으로 하는지 등 구체적 내용은 발표하지 않았다. 블룸버그가 집계한 데이터에 따르면 마이크론의 중국 본토 내 수익 비중은 전체의 11% 수준이다. 홍콩까지 포함하면 최대 25%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컨설팅 업체 올브라이트 스톤브릿지의 폴 트리올로 기술정책 총괄은 “중국이 핵심 정보 인프라 공급망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금융 부문과 운송, 에너지와 데이터 센터가 포함될 수 있다”며 “중국 데이터 센터는 마이크론의 중요 고객이어서 정말 나쁠 수 있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중국 내 기업들도 마이크론 구매를 중단하고, 제품을 교체하라는 정치적 신호로 생각할 수도 있다”고 전문가를 인용해 설명했다.
중국이 미국 반도체 업체를 직접 제재한 건 처음이다. 이에 따라 중국의 정책 기조가 미국에 대한 맞불 대응 방식으로 바뀐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트리올로는 “중국의 조치는 새로운 움직임”이라며 “중국이 미국 조치를 가만히 누워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블룸버그도 “이번 조사는 중국에서 경제 논리보다 국가 안보에 대한 우려가 더 우위에 서면서 ‘보복 찬성’ 목소리가 우세해지는 광범위한 추세의 일환”이라고 보도했다.
워싱턴 소식통도 “마이크론은 중국 내 공장도 없고, 기술력도 높지 않아 충분히 대체할 수 있고, 제재 충격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중국이 마이크론 제재에 나서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중국의 반도체 공백을 메우지 않도록 해달라고 한국 정부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결정으로 중국 기업들은 미국산 메모리 반도체를 자국산이나 한국산으로 대체하려 한다”며 “중국의 공급망에 파급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중국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은 전날 성명에서 “중국은 글로벌 기업과 다양한 플랫폼 제품이 중국의 법과 규정을 준수하는 한 중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미국이 중국 제재에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도 주목된다. 미국은 자국 기업에 대한 중국의 제재를 경제적 강압으로 보고 동맹 및 파트너를 설득해 공동 대응하자고 설득해 왔다. 미국은 이번 G7 정상회담에서 경제적 강압 공동 대응을 위한 플랫폼 창설도 끌어냈다. 이에 따라 미국이 마이크론 제재에 대해 다시 맞불 조치를 발표하고, 동맹 및 파트너의 공동 대응을 요구할 경우 미·중 갈등의 파장이 더욱 확산할 수 있다.
블룸버그는 “이번 움직임은 세계 최대 반도체 시장인 중국에 제품을 판매하는 다른 미국 제조업체들에 새로운 불확실성을 가져온다”고 지적했다. 한 워싱턴 소식통은 “중국의 경제적 강압을 어떤 방식으로 공동 대처할지에 대한 합의는 아직 없다”며 “이번 조치로 한국 기업들도 (중국 사업의) 불확실성이 커진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