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드개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걸친 채 재를 뒤집어쓰고 대궐 문 앞 성중에 나가 대성통곡 한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에스더는 수행원 하닥을 보내 자초지종을 묻게 한다. 모르드개는 유대민족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음을 토로하면서 왕이 하만에게 내린 ‘민족말살’(ethnocide)의 조서 초본을 전달한다. 뿐만 아니라 에스더에게 직접 어전에 나가 왕에게 탄원할 것을 부탁한다.
에스더는 난색을 드러냈다. -왜냐면 왕실관례에 따라 왕의 호출이 있기 전, 그에게 나아가면 죽음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모르드개는 다시 전갈을 보낸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대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대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3~14) 그러자 에스더는 양부와 수산 성 모든 유대인들에게 3일간 금식을 요청하면서 자기 자신도 그렇게 한 후에 죽음을 무릅쓰고 왕을 알현하겠다고 회답했다.
이야기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에스더는 며칠 금식 끝에 왕후의 복장을 갖추고 왕궁 뜰 어전 맞은 편에 섰다. 그녀의 아리따운 모습에 마음이 흔연해진 아하수에로는 금규를 내밀어 그녀를 보좌 가까이 오게 했다. 그러곤 팔로 꼭 껴안으면서 그대가 원한다면 왕국의 절반이라도 내주겠다고 말한다.
그녀는 당장 속엣말을 털어놓지 않는다. 대신 왕을 위한 특별한 잔치를 준비하겠으니 하만과 함께 와 달라고 청한다. 반전의 때를 살핀 듯하다. 하만은 하늘을 찌를 듯 기고만장해졌다. 게다가 왕비는 둘째 날 잔치에도 와 달라고 하지 않는가. 흡족해하며 집으로 돌아가던 그는 베옷을 입고 궁궐 문 앞에 있는 모르드개를 보았다. 기분이 매우 상했다. 그는 아내와 친구들을 불러 “왕후 에스더가 그 베푼 잔치에 왕과 함께 오기를 허락받은 자는 나 밖에 없었고 내일도 왕과 함께 청함을 받았느니라”(에 5:12)고 자랑했다. 근데 딱 하나, 목엣가시처럼 걸리는 모르드개를 어떻게 처치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하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높이 50규빗(약 22m) 되는 나무를 세우고 그를 매달게 해 달라고 왕에게 구하라 충고했다.
그날 밤, 왕은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래서 신하에게 선왕들의 역대기와 궁중실록을 가져오라 지시했다. 서기관은 우연히 왕에게 모반을 꾀했던 빅단과 데레스 사건의 기록을 읽었다. 일기 속엔 모르드개가 왕을 암살하려고 시도했던 역모자를 고발해 공로을 세웠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왕은 잠시 숨을 깊게 내쉰 후 그 일에 대해 모르드개에게 무슨 존귀와 관작을 내렸느냐고 물었다. 측근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때마침 하만이 모르드개의 처형을 간청하고자 평소보다 일찍 입궐했다.
왕은 하만에게 왕이 존귀케 하길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묻는다. 하만은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고 확신하면서 짐짓 겸허한 척 말한다.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 왕이 존귀케 하시길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길 왕이 존귀케 하시길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에 6:8~9) 아하수에로는 즉시 대궐 문에 앉은 모르드개에게 조금도 빠짐없이 그리하라고 명했다.
하만은 왕복과 왕관과 말을 가져다 모르드개를 태우고 성중에 다니며 축하 퍼레이드(?)를 펼쳤다. 하만은 괴로워서 머리를 싸매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당신이 그 앞에서 굴욕을 당하기 시작했으니 능히 저를 이기지 못하고 분명히 그 앞에 엎드러지리이다”(에 6:13)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가 승승장구할 땐 함께 부화뇌동하던 자들도 이제 그의 몰락이 코앞에 닥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멸시했다. 그때 궁궐 환관들이 다다라 왕후의 잔치에 빨리 참석해 달라고 독촉했다. 근데 사부카다스라는 내시가 안뜰에 세워진 장대를 보고 하인에게 무엇 때문에 그것을 만들었냐고 물었다. 그 종은 왕비의 삼촌(모르드개)을 처형하기 위해 마련했다고 답했다.(‘Josephus’ II, 48) 하만은 끌려가듯 에스더의 잔치자리에 앉는다.
두 번째 왕실 저녁만찬은 그의 몰락을 봉인하는 자리였다. 아하수에로는 재차 에스더에게 소원을 물었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왕이여,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케 되었나이다”(에 7:3~4) 감히 그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냐고 묻는 왕에게 에스더는 그녀와 자기민족을 멸망시키려는 하만의 흉악한 술책을 낱낱이 폭로했다. 분노한 왕은 술잔을 내려놓고 왕궁 후원으로 나갔다. 궁지에 몰린 하만은 왕비의 걸상 위에 엎드려서 목숨을 구걸했다. -왕실관례에 따라 왕 이외 남성이 후궁에 속한 여인에게 가까이 접근할 땐 항상 일곱 걸음의 간격을 유지해야 했다.- 잠시 후 연회장에 돌아온 왕은 그것을 보고 (그가) 왕비를 겁탈하려는 줄 판단했다. 호위병들은 즉시 하만을 에워쌌다. 동시에 왕을 모신 내시, 하르보나가 아뢰길, 하만의 집에 모르드개를 처형하고자 설치된 교수대가 서 있다고 했다. 왕은 그 곳에 (그를) 매달라고 명했다. 그야말로 자승자박이다. 그 날에 왕은 유대인 대적, 하만의 집과 재산을 에스더에게 주고 그에게서 거둔 인장 반지는 모르드개에게 맡겼다.
B.C. 474년 6월 첫 번째 칙령이 선포된 지 70일 후, 왕은 읍소하는 에스더를 위해 두 번째 조서를 승낙했다. (이미 선포된 바사의 칙령은 폐기될 수 없었다.) 그 내용인즉, 아달월 곧 십이월 십삼일 하루 동안 유대인을 멸하려는 적들에 대해 스스로 보복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라는 것과 함께 그들에 대한 방어와 공격이 왕권에 저항하는 반역과 반란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성경은 그 날, 수산 시에서 유대인에게 의해 살해당한 자들의 수효가 약 500여 명이며 다음 날 14일에도 약 300여 명의 원수들을 살육했다고 기록한다. (하만의 열 아들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뿐만 아니라 제국 전역에선 12월 13일, 유대인의 조직적인 무장투사들에 의해 총 7만 5천여 명이 죽임을 당했으나 그들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요컨대 ‘푸림’(‘푸르’에 히브리어 복수형 종결어미 ‘임’im을 붙임)의 기원은 하만이 제비뽑기에 의해 유대민족 학살을 꾀한 궤계에서 유래되었다. 운명에 대한 필사적 항거의 역사이다. 이른바 부림일(Day of Purim)은 유대인 사멸의 날(아달월, 14일과 15일)이 뒤집어져 구원의 날이 된 기쁨을 경축하는 절기(에 9:17~19)라고 말할 수 있다. 부언하면 그것은 페르시아 유대인이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 확립하고자 제정한 민족 축일이다.
이정미 객원기자 jonggy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