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신 신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독성학과장은 26년간 독성학을 연구해온 ‘베테랑’이다. 하지만 여전히 감정서 하나를 보낼 때마다 “칼날을 걷는 기분”이라고 했다. 국과수 감정 결과로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과장은 “그래도 내가 쓴 감정서로 사건이 해결되고, 세상이 바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느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분석하고 연구하는 게 좋아서 1997년 2월 국과수에 입사했다. 입사 전까지만 해도 국과수가 어떤 곳인지 몰랐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26년이나 있었다는 건 그만큼 적성에 맞았다는 이야기겠죠”라고 말했다. 이 과장을 지난 4일 국과수 원주 본원에서 만났다.
-부임한 지 막 한 달이 지났다.
“과장 부임 소식이 알려졌을 때 ‘축하합니다’라는 말도 들었지만, 지금 독성학과 상황을 조금이라도 알고 계시는 분들한테는 ‘고생 좀 하시겠어요’라는 말을 더 많이 들었다. 지난해 국과수로 들어온 마약 감정의뢰량이 8만9033건이다. 그런데 감정의뢰를 담당하고 있는 연구 인력은 다른 부서에서 지원 온 인원 2명을 포함해 22명뿐이다. 본래 과장은 행정업무만 처리하지만, 독성학과장은 행정업무와 함께 마약 감정의뢰 연구도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국과수 마약백서를 보면 최근 신종마약류의 증가가 두드러진다.
“마약유통범들에게는 신종마약이 적발이 잘 안 된다는 인식이 있다. 마약의 경우 법에 확실히 규정돼 있어야 규제나 처벌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당국이 신종마약을 발견해 이를 적발할 수 있는 검사 키트를 내놓으면 마약사범들은 마약의 분자 배열만 조금씩 바꿔가면서 새로운 마약을 시장에 내놓는 방식으로 감시망을 피해간다.”
-신종마약류 중 하나가 합성대마다.
“합성대마의 경우 유행이 굉장히 빠른 편이다. 예를 들어 A라는 합성대마를 만들어 퍼뜨릴 때 당국에서 이를 적발해 규제하면, 분자 배열만 조금 바꿔서 A'라는 합성대마를 새로 유통하는 식이다. 실제로 합성대마가 처음 세상에 등장했던 2009년에는 마약이지만 법에는 걸리지 않는다고 해서 전세계적으로 이를 ‘리걸 드러그’(legal drug·합법적인 마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펜타닐도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펜타닐은 치사량이 필로폰보다 매우 낮다. 조금만 삐끗하면 0.01g 차이로도 사망할 수 있다. 전혀 죽을 생각이 없던 사람이 한 번 즐기기 위해 마약을 했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지난번에 (투약)했을 땐 괜찮았으니 이번에도 괜찮으리란 보장도 없고, 중독성도 워낙 강하기 때문에 한번 시작하면 끊을 수 없는 게 펜타닐류다. 미국 필라델피아 켄싱턴의 ‘좀비 거리’가 한국에서 등장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유통범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마약을 만드는 이유는.
“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돈’이다. 문제는 분자 배열을 바꿀 때 마약의 효과가 10분의 1로 줄어들 수도 있지만 100배 이상으로 뛸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마약유통범들은 효과가 100배 이상으로 강해진 마약으로 사람이 죽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들은 본인들이 제약회사도 아니고 책임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마약으로 인한 사망자가 많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한국의 마약 유통량 중 필로폰이 1위인 이유는.
“습관 같은 거다. 우리나라에서도 보면 특정 소주 브랜드만 찾으시는 어르신들이 있다. ‘처음처럼’ 드시는 분들은 ‘참이슬’은 잘 안 드신다. 비슷한 거다. 내게 익숙한 걸 찾게 되고, 또 필로폰의 경우에는 옛날부터 있었으니 구하기도 상대적으로 쉽다.”
-10대들의 필로폰 투약 사례도 늘고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마약 접근성이 좋아졌고 구하기 쉬워졌다는 이야기다. 물론 우리나라는 미국과 같은 외국에 비교해서는 마약 통제가 잘 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마약을 통제하지 못하면 기하급수적으로 우리 사회에 마약이 퍼질 수도 있다. 부검 사체에서 마약류가 검출되는 건수도 지난 3년간 60.47%나 증가했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시기에 놓여있다.”
-신임 독성학과장으로서의 목표는.
“저희는 현장에서 뛰고 있는 수사관들에게 과학적인 근거라는 포탄과 총알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적군이 신종마약이라는 신무기를 만들 때마다 저희도 이에 맞서는 새로운 신무기를 개발해야 한다. 신종마약 탐색을 위한 플랫폼을 개발하고 마약유통 모니터링실도 운영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독성학과가 마약까지 담당하고 있는데, 국과수 내에 ‘마약대응과’를 신설하는 것이 목표다.”
백재연 기자 energ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