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란트’ 신생팀이나 마찬가지인 T1이 2023 ‘발로란트 챔피언스 투어(VCT)’ 퍼시픽 리그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다. 7주 차까지 5승2패를 기록, APAC(아시아 태평양) 지역 최강팀으로 꼽히는 DRX(7승0패)의 뒤를 이어 공동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오는 6월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발로란트 마스터스’가 가시권에 있는 셈이다.
T1의 발로란트 팀은 줄곧 북미 무대에서 활동해오다가 지난 연말 VCT 퍼시픽 리그 출범과 함께 한국 지역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이들은 신생팀이지만 노련하다. 다른 1인칭 슈터(FPS) 장르 게임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베테랑 프로게이머들이 많은 까닭이다.
T1의 주장 ‘제타’ 손선호는 ‘카운터 스트라이크: 글로벌 오펜시브(CS: GO)’, ‘사야플레이어’ 하정우, ‘먼치킨’ 변상범, ‘카르페’ 이재혁은 ‘오버워치’ 프로게이머 출신이다. 덕분에 기본적으로 택티컬 FPS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클러치 플레이에 강하며, 프로 수준의 팀플레이가 익숙하다.
11일 서울 강남구 T1 연습실에서 국민일보와 만난 윤으뜸 발로란트 팀 감독은 “베테랑 로스터의 장점은 팀워크를 끌어올리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신생팀에 가깝지만 팀워크 문제가 없다시피 하다”고 말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보내는 게 목표”
윤 감독은 “어제의 T1보다 오늘의 T1이, 오늘의 T1보다 내일의 T1이 더 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서 “우리는 아시아 지역에서 ‘톱3’로 꼽힐 만한 수준의 경쟁력이 있는 팀이다. 지금과 같은 연습 분위기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VCT 퍼시픽에서도 좋은 결과를 기대할 만할 것”이라고 말했다.
T1은 ‘오버워치 리그’에서 한때 최정상급 선수로 군림했던 이재혁의 합류로 많은 화제를 모았다. 종목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를 팀의 여섯 번째 선수로 선택한 윤 감독은 “이재혁의 마인드셋이 마음에 들었다. 오버워치 출신 선수들도 발로란트에 잘 적응만 한다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좋은 선례가 충분히 많다”고 밝혔다.
윤 감독은 또 “손선호와 변상범은 북미 무대에서 오랫동안 같이 해온 선수들이다.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해 선발했다. 하정우는 북미에서 적으로 상대하며 실력이 좋다고 판단했다. ‘밴’ 오승민도 미국의 나이츠 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고 전했다.
1시부터 10시까지 맹훈련…탄탄한 기본기가 팀 기조
T1의 일과는 오후 1시에 시작한다. 팀원들은 연습실에 모여서 3시까지 그날의 연습 세션을 소화한다. 윤 감독은 “전날 밤에 연습할 내용을 준비해놓는다. 이전 경기를 피드백하거나, 특정한 콘셉트를 짜놓고 연습해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3시부터 6시까지는 이날의 첫 스크림을 진행한다. 연습 상대는 대부분 한중일 3개 지역의 1·2부 프로팀이다. 어센션 윤 감독은 “싱가포르 등 동남아 현지 팀과 연습만 해도 핑 문제가 발생해서 주로 한중일 팀들끼리 연습을 한다”고 전했다.
첫 스크림 종료 후엔 1시간 동안 저녁을 먹는다.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두 번째 스크림을 진행한다. 스크림이 끝나면 10분 휴식 후 그날의 스크림 영상을 복기하거나, 기량 향상을 위한 피드백을 진행한다. 여기까지가 팀의 하루 스케줄이다. 이후에는 선수들이 자율적으로 연습 시간을 갖는다.
T1의 강점이자 지향점은 ‘탄탄한 기본기’에서 나오는 전술적 순발력이다. 윤 감독이 생각하는 발로란트에서의 기본기란 게임 안에서 본인이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빠르게 최선의 선택을 하는 능력이다.
윤 감독은 “APAC(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특색이자 문제점은 셋업 플레이의 비중이 높다는 것”이라면서 “그러다 보니 작전이 분석됐을 때는 헤매는 경우가 많다. 처음부터 기본기를 갈고닦는 게 중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이어 “다른 지역은 셋업 의존도가 낮다. 북미 지역은 특히나 선수 개개인의 순간적인 판단에 의존해서 게임에 풀어나간다”면서 “대부분의 APAC 지역팀들은 작전 의존도가 높아 시즌 말미가 되면 철저하게 분석 당한다. 기본기가 탄탄한 T1은 그렇지 않다”고 덧붙였다.
T1은 또 연습실 문화 조성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윤 감독은 “종목을 불문하고 ‘정치’하는 문화가 생긴 팀들이 있다. 한 선수를 범인으로 만들어놓고, 경기에서 지면 그 선수에게 독박을 씌운다. 이런 팀들은 시즌 종료 후에 범인으로 몰린 선수를 갈아치우지만 결국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라면서 “선수들이 실력을 객관화하는 문화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프로 인생 마지막 기회…자랑할 만한 커리어 만들고파”
일부 선수는 ‘프로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도쿄행을 노리고 있다. 오버워치 리그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던 변상범은 “프로게이머 생활을 6년간 했음에도 여지껏 자랑할 만한 커리어가 없다”면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곳 T1에서 자랑할 수 있는 커리어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재혁 역시 “세계 대회 진출을 목표로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처음엔 종목 적응에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개인적으로도, 팀적으로도 기량이 많이 올라왔다고 자신한다”며 “플레이오프, 마스터스, 챔피언스까지 진출해 보이겠다”고 밝혔다.
윤 감독 역시 아시아 태평양보다 넓은 무대를 조준하고 있다. 그는 “세계 대회 진출뿐만 아니라 그곳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는 게 목표”라면서 “연말에 ‘팀이 많이 성장했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