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으로부터 지령문을 받고 노조 활동을 빙자해 간첩 활동을 벌인 혐의로 전직 민주노총 간부 4명이 구속기소 됐다.
이들은 북한 지시에 따라 ‘지사’라는 지하조직을 결성해 민주노총을 장악하려고 시도했으며 정권 퇴진 및 반미 등 정치 투쟁을 주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의 사무실과 주거지 등에서 발견된 북한의 지령문은 90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사상 최다 규모다.
수원지법 공공수사부(부장검사 정원두)는 10일 국가보안법 위반(간첩·특수잠입 및 탈출·회합 및 통신·편의 제공 등) 혐의로 민주노총 전직 조직쟁의 국장 A씨(52), 전직 보건의료노조 조직 실장 B씨(48),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의 전직 부위원장 C씨(54), 산하 연맹 조직부장 D씨(51)를 재판에 넘겼다.
검찰에 따르면 A씨는 2017년 9월 캄보디아와 2018년 9월 중국에서 각각 북한 공작원들을 접선하고 국내 활동 등 지령을 받은 혐의를 받는다. A씨는 2018년 10월부터 지난해 12월 총 102차례 북한 지령문을 받았고, 민주노총 내부 통신망 아이디와 비밀번호 등이 기재된 대북 보고문을 북한에 전달했다.
B씨 역시 2017년 9월 캄보디아에서 북한 공작원들을 만나 지령을 받았으며 이듬해 4월엔 강원지역 조직 결성에 대한 지령을 받아 실제 활동한 것으로 드러났다. C씨와 D씨는 2017년과 2019년 캄보디아와 베트남에서 각각 북한 공작원들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받은 북한 지령문에는 대남 공작을 위한 조직 결성과 세부적인 활동에 관한 지시 사항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검찰에 따르면 A씨 등과 북한 공작원들이 주고받은 ‘대북통신문 약정 음어’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초월적인 존재라는 의미에서 ‘총회장님’으로 지칭됐다.
북한 문화교류국은 ‘본사’이며 지하조직은 ‘지사’로 불렸다. 민주노총은 지하조직 지사의 지도를 받는 조직이라는 뜻에서 ‘영업1부’로 지칭됐다.
각각 지사장과 팀장으로 불린 A씨 등은 새 인물을 지하조직으로 포섭하기 위해 북한이 지령한 5단계 절차인 ‘친교 관계 형성→사회 부조리에 대한 불만 촉발→사회주의 교양→비밀조직 참여 제안→적극적 투쟁 임무 부여’를 수행했다.
포섭 과정은 대상자의 가정을 직접 방문해 경제 상황을 확인한 뒤 ‘본사’인 북한 문화교류국의 검열을 통해 최종 승인받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들은 북한으로부터 ‘민심의 분노를 활용해 기자회견 발표, 촛불시위 등으로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키라’는 등의 지령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이 북한 공작원을 만나는 과정은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손에 들고 있던 생수병을 열고 마시는 동작, 혹은 손에 든 선글라스를 손수건으로 2∼3차례 닦는 동작으로 약속된 신호를 주고받으며 접선했다.
특히 A씨는 20여년 간 북한 공작원과 접선·교류하면서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따뜻한 동지’ ‘혈육의 정’을 나누었다는 표현을 주고받을 정도로 긴밀한 사이를 유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 관계자는 “영화 시나리오처럼 북측이 특정 행동을 정해줬다”며 “그에 따라 접선이 이뤄진 게 확인된 최초 사례”라고 설명했다.
북한은 민주노총을 앞세워 주요 사회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물리적·폭력적 수단을 동원해 투쟁을 전개하도록 지침을 보냈다.
2019년 2월 당시 야당이던 현재 여권 인사의 ‘5·18 망언’을 계기로 농성 투쟁 및 촛불 시위를 진행하게 지시했고, 같은 해 4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대비해 계란 투척, 화형식, 성조기 찢기 등의 방법을 연구해 실천하라고 주문했다.
북한은 국내에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일어난 같은 해 7월 일장기 화형식, 일본인 퇴출 운동, 대사관 및 영사관에 대한 기습 시위 등 반일 투쟁도 적극적으로 벌이도록 요구했다.
검찰과 국정원 등 공안 당국은 이번 수사로 90건의 북한 지령문과 24건의 대북 보고문을 확보했으며 이들이 주고받은 통신문건의 암호를 해독해 지하조직을 적발했다.
A씨는 북한으로부터 받은 암호자재(암호화 프로그램인 스테가노그래피 및 이를 실행할 수 있는 파일이 저장된 매체)인 SD카드를 소지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공안 당국은 이번 수사로 적발한 지하조직의 조직원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추가 수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오기영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