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계엄군 광주 부녀자 성폭행 51건 공식 확인

입력 2023-05-08 11:18 수정 2023-05-08 11:22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부녀자 성폭행이 정부 차원의 공식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그동안 성폭행 의혹 제기와 피해 당사자의 진술은 이어졌지만 정부 기구에 의해 전체 피해 건수 등이 파악된 것은 처음이다.

8일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에 따르면 5·18 당시 계엄군의 집단 강간 등 성폭행 사건 51건에 대해 현재 직권조사 등을 벌이고 있다. 40여년 전 계엄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고생과 여대생 등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이후 극단적 선택으로 삶을 마쳤거나 지역 정신병원에 오랜 기간 입원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대상 51건의 유형은 2018년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 등이 조사한 17건, 광주시 보상심의자료 26건, 자체 제보접수 8건이다. 조사위는 이중 24건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20건은 피해 당사자가 조사를 거부했고 7건은 당사자와 가족 사망 등의 이유로 조사가 불가능했다.

조사 결과 전체 성폭행 피해자들 가운데 최소 2명~4명은 여고생이었다. 10대의 어린 나이로 계엄군에 짓밟인 이들을 포함해 7명이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거나 관련 치료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계엄군이 최소 2회 이상 한 부녀자를 대상으로 집단 성폭행을 저지른 사실도 드러났다.

당시 여고생 A씨는 조사위에서 1980년 5월 19일 다른 여성 2~3명과 함께 계엄군에 체포돼 광주 남구 백운동 한 야산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끌려가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다른 피해자 B씨는 5월 20일 새벽 언니 집에서 돌아오던 중 계엄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트라우마에 시달려 1982년부터 국립나주정신병원, 1986년 대구시립희망원 등 정신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1988년부터 다시 나주정신병원에서 30년 넘게 입원 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십 년 동안 그때의 충격으로 정신병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사례도 있다. 당시 여고 3년생 C씨의 유족과 주변인 등 10명은 C씨가 5월 19일 계엄군에 납치돼 광주 모처 야산으로 끌려가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외곽 길거리에 버려졌다. C씨는 광주 한 대학에 진학했지만 이상행동을 보여 정신병원을 전전하다가 1985년 분신해 목숨을 끊은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위는 일부 피해자들이 가해자인 계엄군의 이름과 계급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5·18조사위는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최후의 진압작전을 벌인 옛 전남도청에서 시민군을 유혈진압한 뒤 미니버스에 태워 간 미성년자에 대한 조사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5·18당시 프랑스 사진기자 2명의 사진을 토대로 계엄군에 잡혀간 미성년자를 총 3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사위는 이들 중 당시 11살 조모씨에 대한 조사를 마쳤다. 조씨는 도청에서 일하던 어머니를 찾아 집을 나섰다가 27일 새벽 계엄군에 의해 광주 송정리 군부대로 끌려가 1주일간 군 막사에서 지냈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망쳐 서울로 간 그는 8년 뒤 아버지가 자신을 행방불명자로 신고하면서 신원이 뒤늦게 확인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조사위는 계엄군 성폭행이 은밀히 이뤄진 데다 오래전에 발생한 탓에 진상규명에 어려움이 많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조사위는 부대 이동 경로와 개인별 근무지 배치, 내부 고발을 중요 단서로 삼아 조사를 진행 중이다.

조사위는 전체 성폭행 사건 조사 과정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계엄군 2명에 대해 면담 조사를 벌였으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고 덧붙였다.

송선태 5·18조사위 위원장은 “반인도적으로 이뤄진 성범죄 특성상 피해자 위주로 신중히 조사를 벌이고 있다”며 “당시 광주·전남 정신병원·집단수용시설 전수조사를 진행해 행방불명된 이들을 한명이라도 더 찾아내겠다”고 말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