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기술 기반 금융회사 보안팀장으로 근무했던 A씨는 회사가 보유 중인 정보보호 관리 기술을 이직하려던 싱가포르 회사에 유출했다. A씨가 이직한다는 사정을 알게 된 회사는 출입증을 회수하고 시스템 접근 권한을 정지했다. 하지만 그는 휴일에 보안팀 부하직원들을 출근하도록 한 뒤 도움을 얻어 사무실 캐비닛 등에 보관돼 있던 회사 기밀 자료를 무단 취득했다. 피해 기업은 해당 기술 개발을 위해 2년간 70억원을 투자했다. 법원은 2021년 11월 “A씨가 부하직원들에게 회사 허락이 있었던 양 행동해 기밀 자료를 취득했다”면서도 회사가 입은 구체적 피해를 특정하기 어렵다며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국가 간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하며 한국 기업을 대상으로 한 기술 유출 시도가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법원은 초범이거나 피해액을 특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등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고 있다. 해법을 논의하기 위해 대검찰청과 특허청은 2일 서울 서초구에서 ‘기술유출 범죄 양형기준 세미나’를 열었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2018~2022년 5년간 적발된 산업기술 해외유출 사건은 총 93건, 피해액은 약 25조원으로 추산된다. 기술유출 범죄는 국정원이 증거를 확보해 수사기관에 전하기 때문에 실제 범행과 수사 사이 시간 간격이 발생한다. 적발되지 않은 사건까지 포함하면 기술유출로 인한 경제 피해는 훨씬 막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초범, 피해액 추산 어려움 등을 이유로 가벼운 형이 선고되고 있지만, 기술유출 범죄 특성상 기술유출을 저지른 이는 대부분 초범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한 회사나 업종에 상당 기간 재직한 베테랑들이 업무상 알게 된 기밀을 범죄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한 검찰 관계자는 “기업들과 기술유출을 할 수 있는 개인을 중개해주는 브로커 회사도 있어 파악에 나선 상황”이라고 말했다.
의료기기 업체에서 근무한 B씨는 회사 대표와 근무조건 관련 갈등을 겪었다. 그러던 중 회사 기술을 가지고 오면 중국 회사에 취업시켜주겠다는 C씨 제안을 받았고, 회사 컴퓨터에 저장돼 있던 의료기기 설계도면 파일을 이동식 저장장치에 담아 무단 반출했다. 이후 해당 중국 업체는 피해 회사 의료기기와 유사한 제품을 만들어 특허 등록까지 마쳤다. 법원은 2021년 6월 “유출 기술이 중국 업체 특허 출원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 산정하기 어려워 피해 회사의 정확한 피해액을 추산하기 어렵고, B씨가 70세에 가까운 고령”이라며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기술유출 범죄 피해액을 산정할 때 해당 기술이 유출되지 않았을 경우 기술 보유자에게 돌아갔을 수익을 기준으로 판단을 내린다. 개발 중이거나 시제품 단계인 기술의 경우 시장 가치를 알 수 없기에 피해액 추산도 어렵다. 이 때문에 기술유출 범죄 피해를 산정할 때, 회사가 기술 개발에 들인 연구개발 비용도 포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검은 지난달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기술유출 범죄 양형기준 강화 의견서를 제출했다. 현재 국가핵심기술 해외유출의 법정형은 징역 3~30년, 영업비밀 해외유출의 법정형은 최대 징역 15년까지 규정돼 있다. 하지만 현재 적용 중인 양형기준은 2017년 5월에 수립돼 해외유출은 최대 징역 6년, 국내유출은 최대 4년 등 법정형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2019~2022년 선고된 기술유출 사건 중 실형은 10.6%에 불과했고, 2022년 영업비밀 해외유출 범죄에 선고된 형량은 평균 14.9개월에 그쳤다.
조용순 한세대 산업보안학과 교수는 세미나에서 “기술을 해외로 유출한 사람에 대한 권고 형량을 2~5년으로 기존보다 2배 이상 높이고, 초범도 강도 높은 형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지식재산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다. 지식재산·기술 유출 범죄는 황금알을 낳기도 전에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개별기업과 국민경제에 끼친 피해에 상응하는 엄중한 처벌이 이뤄지도록 제도적 기반을 강화할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