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하늘만 보고 걸었다. 삼각형 모양의 지붕 위, 반짝거리는 네모블록들이 어디에 얼마나 있을지 궁금해서였다. 이 지붕엔 7개, 저 지붕엔 20개…. 관광지를 걸을 땐 잘 안 보이던 태양광 패널들이 주거단지로 들어서자 곧잘 눈에 띄었다. 커다란 바구니에 20개는 거뜬히 넘은 듯 보이는 플라스틱 병과 알루미늄 캔을 담아와 보증금 회수기에 넣는 주말아침의 풍경도 이들에겐 일상이 됐다. 국가의 위법을 말한 2019년 ‘우르헨다(Urgenda) 판결’ 이후 생활상 자체가 친환경으로 변모한 네덜란드 얘기다.
국민일보는 지난 13~16일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암스텔베인, 암스테르담을 방문해 우르헨다 판결 이후 네덜란드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는지 취재했다. 기후변화 소송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에서, 판결이 실제 생활의 변화로 의미 있게 이어지는지 살필 필요가 있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5년 전쯤부터 이런 변화들이 급격히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 스스로가 “가장 크게 체감한다”고 말하는 부분은 태양광 패널을 설치한 가정의 증가다.
너도나도 태양광
지젤 사롤리아(64)는 2012년 4월 자신의 집 지붕에 9개의 태양광 패널을 설치했다. 당시는 화석연료 대신 태양광 에너지를 쓴다고 해서 간편하게 보조금을 지급받지도 못하던 때다. 그가 태양광 패널을 설치한 이유는 거창한 환경보호가 아니었다. “매일 떠 있는 태양으로 전기를 생산하고, 바로 집에서 쓸 수 있다고?” 하는 호기심이 더 컸다고 한다. 당시 복잡했던 태양광 패널 설치 보조금 지급 절차는 지금은 간소화됐다. 신청 이후 지급받는 시간도 7~8주로 줄어들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는 이들은 늘었다.사롤리아는 “우리가 전기를 쓰면 톱니원판이 오른쪽으로 막 돌아가는데, 태양광 패널이 충전되고 있을 땐 왼쪽으로 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기계량기가 보여주는 숫자가 11년 전과 비교해 거의 바뀌지 않았다”고 빙긋 웃었다.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 사용한 11년간 전기 사용이 거의 없었다는 의미다. 그는 11년간 매월 전기계량기에 떠오른 숫자를 수기(手記)해 뒀다. 에너지 요금 청구서에 ‘0’이 찍히는 건 아니다. 아직 가스레인지를 사용하고, 에너지 인프라 사용료 등 부가 비용도 청구되는 까닭이다. 사롤리아는 “인덕션으로 바꾸는 것도 생각 중인데, 아직 정부가 넘치는 전기를 잘 관리하지 못하는 것 같아 고민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롤리아는 자신의 집에서 마주 보이는 이웃집들을 가리켰다. “이 집도 태양광 패널이 있고, 저 집도, 저 집도 태양광 패널을 쓴다”고 했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주변 집들의 지붕을 올려다보니 짙은 남색의 반짝이는 태양광 패널들이 가지각색의 모양으로 보였다.
지난해 태양광 패널 20개를 설치했다는 니콜라스 펑(54)은 “그동안 계속 관심은 있었지만 기술적으로 안정됐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며 “정부 보조금도 있고 해서 지난해 총 1만 유로(약 1480만원)를 들여 설치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동네엔 80% 정도가 태양광 패널을 설치한 것 같다”고 했다. 위트레흐트에서 만난 윌리엄 비켄스는 “동네 주민들과 함께 다음 달에 설치할 계획”이라고 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아직 설치하지 않았다면, 동네 주민 여럿이 함께 설치할 경우 비용이 더욱 저렴하다”는 내용의 안내장을 정부로부터 받곤 한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곳에 살면 그런 안내장을 받는 경험을 여러 차례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네덜란드 정부에 따르면 태양광 패널의 설치 용량은 2020년 1만1000㎿에서 2021년 1만4400㎿로 약 31%가 늘었다. 같은 기간 총 에너지 소비량에서 태양광 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1.62%에서 2.06%로 증가했다. 2021년 재생에너지는 전체 에너지 소비의 12%를 차지했는데, 이 가운데 태양광은 바이오매스(6.32%), 풍력(3.42%)에 이어 3번째로 많았다.
“우리는 변화의 가운데에 있다”
“Stikstofcrisis.” 네덜란드의 최근 관심거리가 뭔지 묻는 질문마다 이 응답이 돌아왔다. 해석하면 ‘질소위기’다. 과거 없던 말이 일상적으로 쓰일 정도로, 네덜란드에서는 수년 전부터 사회 각계가 질소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2019년부터 질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며 건설 프로젝트들을 중단시켰고, 가축 분뇨가 질소 화합물인 암모니아를 배출한다며 가축 사육두수를 3분의 1가량 감축하기로 했다. 농민들이 이 정책에 크게 반발하면서 신생 우익 포퓰리즘 정당인 농민-시민운동당(BBB)이 급부상, 지난 3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다.기후위기의 영향을 줄이기 위한 일상 속 실천에 관심이 많은 프란스 반 덴 버그(66)는 “BBB의 돌풍이 오래 가진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환경적인 메시지를 취하고 있다. 질소 이슈가 강한 상황에서 BBB의 모멘텀은 내년이면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정부가 정책을 통해 에너지 전환 이슈에 접근하면서 사람들이 내 집을 단열하고, 태양광 패널을 이용해 직접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집을 가스에서 전기로 바꾸고 하는 모든 것들이 이제 막 시작됐다.” 그는 “우리는 지금 그 변화의 과정에 있다”고 말했다.
그 동기가 정부 보조금이든 환경보호에의 공감이든 간에, 네덜란드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 속에서 하나 이상의 친환경적 실천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대표적인 것은 자전거 타기다. 국민 1700만여명이 약 2340만대의 자전거를 보유한 네덜란드는 자전거의 나라로 불린다. 국민일보가 만난 네덜란드 사람들은 “코로나 이후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더 늘었다”고 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외출에 제약이 생기면서 근거리를 자전거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게 일상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 정부도 탄소배출 감축을 위해 자전거 및 대중교통으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자전거만으로도 이동할 수 있는 지역을 확대하기 위해 자전거 도로를 잇고 대규모 자전거 주차장을 주요 역마다 만드는 중이다. 지난 2월엔 암스테르담 중앙역에 7000대의 자전거를 수용할 수 있는 수중 자전거 주차장이 개장했다. 2019년 만들어진 위트레흐트 중앙역의 자전거 주차장은 1만2500대를 수용하는데, 세계 최대의 규모로 유명하다. 면적이 넓지 않은 네덜란드는 자전거로도 충분히 도시 간 이동이 가능하다.
국민일보는 네덜란드에 방문한 기간 신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기후위기 대책을 접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지난 1일부터 ‘알루미늄 캔 보증금 제도’가 시행 중이었다. 상점에서 알루미늄 캔에 담긴 음료수를 판매할 때 제품의 가격에 0.15유로(약 222원)의 보증금을 더하고, 소비자가 빈 용기를 가져올 때 보증금을 돌려주는 제도다. 마트마다 빈 용기를 수거하는 기계가 설치돼 있어 보증금을 바로 반납해줄 수 있다.
이는 ‘플라스틱 병 보증금 제도’를 알루미늄 캔으로 확대한 것이었다. 네덜란드에서는 2021년 7월부터 3ℓ 이하의 플라스틱 병에 보증금 0.15~0.25유로(약 222~370원)를 부과해 왔다. 마트에 빈 플라스틱 병을 가져가 보증금을 돌려받는 일은 네덜란드 사람들의 일상이 돼 있다. 국민일보는 에코백과 백팩, 비닐봉지에 플라스틱 병과 알루미늄 캔을 가득 담아 마트에 가는 네덜란드 사람들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정부의 목표는 보증금을 부과한 플라스틱과 캔의 90%를 회수, 폐기물을 줄이고 재사용을 늘리는 데 있다고 한다. 네덜란드에서는 매년 6억개 이상의 대형 플라스틱 병과 9억개의 소형 플라스틱 병, 그리고 25억개 이상의 캔이 시장으로 나온다고 한다. 특히 플라스틱은 매립해도 좀체 썩지 않고 태우면 대기오염 물질이 발생한다.
플라스틱 병과 캔을 담아온 이들이 수거기에 빈 용기를 넣으면 보증금이 차곡차곡 쌓였다. 사람들은 이 보증금을 그 마트에서 장을 볼 때 쓰거나 현금으로 돌려받았다. 보증금을 돌려받으려 마트를 찾는 이들의 발길은 계속 이어졌다. 사람들은 평일에도 주말에도 빈 용기들을 수거기에 넣고 보증금을 받아 갔다.
기후악당, ‘기후노력국’ 되기까지
네덜란드가 애초부터 에너지 전환이나 친환경 정책에서 두각을 드러낸 나라는 아니었다. 특히 네덜란드의 전력 시스템은 주로 천연가스와 석탄을 중심으로 한 화석연료에 치중돼 재생에너지 측면에서 다른 유럽연합(EU) 국가들보다 뒤처진 편이었다. 하지만 우르헨다 소송의 지방법원 판결(2015년)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202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보다 최소 25% 이상 줄이는 목표(165.4메가t 미만)를 달성해야 했기에 네덜란드 정부는 변화에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네덜란드 정부는 종전까지 있던 10기의 석탄화력발전소 중 5기를 2017년까지 폐쇄했다. 또 모든 석탄화력발전소를 2030년까지 폐쇄하기로 했다. 2050년까지 사용하는 모든 에너지를 지속 가능한 에너지로 대체한다는 목표 하에 풍력과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의 성장을 가속화하고 있다. 국민들에게는 지속가능 에너지 및 에너지 절약을 위한 투자 보조금(ISDE)을 지급하며 가구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2030년부터 내연기관차의 판매를 금지하기로 했다. 자동차 대신 자전거 및 대중교통으로 교통수단을 전환하기 위한 투자를 진행 중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로써 2020년에 1990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을 25.5% 감축(164메가t 배출)하며 우르헨다 소송에서 제시된 목표를 달성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앞으로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2030년까지 1990년 대비 49%, 2050년까지는 95%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기후친화국이 되기 위한 첫 걸음을 떼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롤리아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많은 논쟁이 이뤄지고 사람들의 인식도 좋기 때문에 친환경적인 것 같지만, 아시아나 아프리카 같은 곳에 우리가 산업적으로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친환경적인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덴마크 같은 나라들이 (친환경 정책으로는) 우리보다 잘하고 있다. 더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슈&탐사팀
암스테르담·위트레흐트=정진영 기자
이택현 김지훈 이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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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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