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바람으로 응답하셨다

입력 2023-04-25 15:26 수정 2023-10-17 13:46

“한국인 부인을 찾습니다.”
신발을 벗어들고 울면서 ‘번둥안 힐히르 시장’을 미친 듯이 뛰던 남편의 비서 싼띠가 나를 붙들었다. “부인 큰불이 났어요.”

“아이들은 어떻게 했어?” 먼저 아이들 안부를 물었다. 아이들은 반대편 동네 한국친구의 집으로 옮겼다는 싼띠의 말에 고맙다는 인사가 절로 나왔다. 나는 황급히 빼차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번둥안 힐히르 스불루 은암 음받 10가 64번지”라고 입술이 떨려 가까스로 빼차 기사에게 집 주소를 일러주었다.

화마에서 우리 아이들을 구한 싼띠는 기독교인이었다. 그녀는 차 안에서도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끌어안고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참았다. 주 안에서 사랑은 국경도 초월한다는 생각을 했다.

싼띠는 40여 채의 집을 태우던 불길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안절부절못하며 하나님을 부르짖는 그녀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평소에는 가까운 길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현장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속 방망이질이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아이들을 깨워 업어서 안전한 곳에 맡겼다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친구의 집은 그 당시 동국건설 지점장 집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온 동네는 아수라장이었다. 회사 직원들과 관계자들이 화마의 현장으로 달려 나왔다. 화재를 당한 이웃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었다. “코리아 뚜안 코리아 뚜안, 한국의 하나님”이라고 외쳤다.

경찰들이 출동했으나 집어삼키려는 불길 앞에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서른아홉 채의 집을 잿더미로 만들고 불길이 우리 집을 향해 번지고 있었다. 그때 내 입에서 “주여 저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회개 기도가 터져나 왔다. “주여 무슬림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신 기적을 보여주소서”라고 피를 토하듯이 외쳤다.

순간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두려워 말라.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이샤야 43:2)”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아멘.” 나는 소리 내어 말씀을 외우며 기도했다.

우리 옆집 서른아홉 번째 집을 태우고 질주하던 불길이 갑자기 뚝 멈춰 서더니 회전했다. 반대편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옆집의 불길을 거꾸로 몰고 달리는 것이었다. 놀라웠다. 불길은 다 타버린 집들 방향으로 세찬 강풍에 밀려 방향을 바꿨다. 바람을 목격한 동네 사람들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사는 동안 그런 바람은 처음 보았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외치며 펑펑 울었다. 무슬림들 앞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주신 것이다.

화재의 현장은 수라바야에 고속도로 공사를 하는 한국건설회사 지사장의 숙소 우리 가족이 기거하는 집이었다. 날마다 새벽이면 무슬림들이 확성기를 틀어 염불처럼 외우는 소리에 괴로웠는데 재난 앞에서 대한민국의 하나님을 부르며 외쳤다. 여호와 이레의 기적을 그들에게 보여주셨다. 눈앞에서 강풍을 끌어다 불길을 반대편으로 옮긴 것은 기적이었다.

우리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자녀들을 상황 따라 관리하시고 기적을 보여 주시는 것을 현장에서 보여주셨다. 강풍이 불길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때 그들이 치던 박수 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하나님은 내 아이들 머리카락 하나도 상함 없이 지켜 주셨다. 옆집과 우리 집 담벼락이 이미 뜨겁게 달궈져 곧 불이 붙을 위기였다. 정말 간발의 차이로 불화살은 꺾으셨다.

30년 폭정을 강행한 지도자가 수백만의 정적을 만들고 화교들을 숙청하기도 했다. 과거 인도네시아 국민은 비통한 일들을 많이 겪어온 민족이다. 그들은 아이러니한 삶의 철학을 갖고 산다. 독재에 시달리면서도 국민이 낙천적이다. 나는 종이 되고 저분은 나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알라의 뜻이라는 믿음이 있다. 무슬림 국가가 아님에도 국민 80~90%가 알라를 따른다. 다행히도 중국인 2세 싼띠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주변 지인들이 나를 보면 인도네시아에 주둔한 한국 지사를 통틀어 가장 미인 비서를 두었다고 걱정을 했다. 지사장 부인은 소녀 같은데, 비서는 숙녀인 데다 미인이니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람의 내면세계는 절정의 순간에 정금같이 드러난다. 싼띠는 나보다 더 큰 소리로 “사양 요냐! (실락간 뚜안)”를 외치면서 하나님께 가족의 안전을 간구했다. 싼띠의 진심은 내가 그녀를 믿는 그대로 드러났다. 우리는 국적이 다르지만 진실한 믿음의 자매였다.

남편은 요셉의 고난을 이미 간접 경험한 간증자였다. 3000여 명의 인력을 지휘하며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들에 시달리는 남편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로 중보기도를 하는 것이 내 사명이었다.

남편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자주 염려했다. 자원이 풍부한 인도네시아와 사우디는 우리나라의 경제부흥을 위해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는 유일한 요충지라는 것이다. 눈 붙일 겨를이 없이 몸을 혹사하던 남편은 인도네시아 열병에 시달리며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해는 1981년 막내아들이 8개월이 되던 해였다.

2년 전부터 남편은 공사현장에 필요한 장비의 입찰문제로 독일과 유럽을 드나들며 인생 절정기의 정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자녀들의 장래를 위한 꿈은 세 아이를 모두 국제인으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교육에 관한 굳은 철학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는 세계로 뻗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은 틈만 나면 나를 설득하려 유대인의 탈무드 예까지 들어가며 동의를 구했다. 임기를 마치면 제삼국으로 옮겨갈 계획을 고심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일어난 화재사건을 통해 우리 부부는 하나님 앞에 함께 무릎 꿇어 기도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미래를 예비해 놓고 계심을 우리는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 일은 우리 가족이 나아갈 길을 다시 돌아보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한국에서 다니던 D 교회가 성전 건축을 시작한다는 말을 들었다. 남편은 토목기술사였기에 목사님은 남편의 임기가 끝나길 간절히 기다리고 계셨다. 건축에 관한 모든 계획을 의논하기 위해 남편의 도움이 필요했다.

우리 부부가 제3국으로 이민을 떠나면 귀국할 날을 고대하던 목사님은 얼마나 서운하실까. 남편이 갈등을 겪고 있을 때였다. 화재사건은 우리 부부에게 큰 울림을 주는 메시지였다. 우리 가족은 꿈꾸던 모든 계획을 접고 목사님의 환영을 받으며 고국으로 들어왔다.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에 고속도로 공사를 꼬박 4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려 완공하고 귀국했다.

그 이후 수많은 해외 선교사들이 수라바야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사역을 한다는 것이다. 알라를 섬기는 그들에게 불일 듯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가. 기독교가 점점 퍼지고 있다니 얼마나 기쁜 소식이었는지, 진정으로 가슴 뿌듯한 일이었다.

미개지인 밀림지대 들짐승과 전염병이 속출하는 막막하던 곳에 길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매 순간 고난을 통한 축복이 벅차게 느껴졌다. 길이 없는 미개지 가난하고 고달픈 민족에게 길을 만들어 주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는지, 남편은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며 종종 얘기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 아니고서는 버틸 수 없는 힘든 순간들이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토목 기술사인 자신의 전공 분야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마음 가득 소유한 사람이었다. 남편의 피와 땀과 눈물이 서린 곳, 청춘의 한때, 생명의 위협이 받아가며 일했던 수라바야에 고속도로 그곳에 남편의 흔적이 길이길이 인도네시아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그 길을 통해 어둠에서 하나님의 빛을 받아 새 생명을 얻는 이들이 계속 불어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사야 43:20)


<벽시계>

채칵채칵 돌고 있는
벽시계를 보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사람을 길들이고
세상을 호령한다
초침과 분침에 쫓기어
학교로 직장으로
공장으로 달려간다
시간이 이끄는 계절,
소생의 봄,
녹음 짙은 여름,
온 세상을 물들인 가을
하얀 눈발 옷을 입어보라
순백의 성결을 가르치는 겨울

누군가는 신생아를 맞으러
산부인과로 달려가고
누군가는 첫사랑의 재회를 꿈꾸며
차오르는 희열에 들떠있다
더러는 중환자실 문 앞에서
멍하니 벽시계를 바라보며
초침이 멈춰서주길 애원한다
가혹한 벽시계는 멈추지 않는데
여기저기 생명들이 숨을 멈춘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생명의 멈춤,
나만 모르는 나의 순번은
내 몸 어디엔가 붙어있다
누구나 자기의 순번이 있다
나의 창조주만 아는 내 시간

※사람은 살기 위해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살기 위해 죽는다. -탈무드-

◇김국애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계간 현대수필 운영이사, 수필집 ‘길을 묻는 사람’ 저자. 이메일 gukae8589@daum.net
정리=

전병선 미션영상부장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