앳된 영정에 ‘당신 잘못 아닙니다’…국대 출신 전세사기 피해자 발인

입력 2023-04-20 07:46 수정 2023-04-20 10:55
20일 오전 인천시 중구 인하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전세사기 피해자 A씨(31·여)의 관이 운구차에 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를 입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30대 여성이 유족의 슬픔 속에 영면에 들었다.

20일 오전 인천시 중구 인하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전세사기로 보증금 9000만원을 잃고 숨진 피해자 A씨(31·여)의 발인이 엄수됐다. 고인의 영정에는 단발머리에 흰 블라우스를 차려입은 앳된 모습이 담겼다.

아버지 B씨(54)는 슬픔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다른 이들의 부축을 받으며 딸을 배웅했다. 영정을 두 손에 든 여동생은 내내 고개를 떨군 채 침통해했다.

생전 A씨는 타지에 사는 아버지와 단둘이 일본 여행을 갈 만큼 살뜰히 가족을 챙기던 딸이었다고 한다. 그는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국내 최연소 육상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돼 여자 해머던지기 종목 5위를 한 유망주이기도 했다.

20일 오전 인천시 중구 인하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전세사기 피해자 A씨(31·여)의 발인이 치러지고 있다. 연합뉴스

빈소 앞에는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화환이 놓여 있었다. 유망한 운동선수였던 고인을 기리고자 여러 체육 단체에서 보낸 화환들도 줄지어 세워졌다.

국내외 대회에서 선전하며 선수와 코치 생활을 이어가던 A씨는 2019년 9월 미추홀구에 정착한 뒤 ‘건축왕 전세사기’ 사건의 피해자가 됐다. 그가 살던 아파트는 지난해 전세사기 피해로 전체 60가구가량이 통째로 경매에 넘겨졌다.

20일 오전 인천시 중구 인하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전세사기 피해자 A씨(31·여)의 발인이 치러지고 있다. 연합뉴스

A씨는 재계약하면서 임대인 요구로 보증금을 9000만원으로 올려줘 최우선변제금조차 받지 못했다. 2017년 준공된 이 아파트는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따라 전셋집이 경매에 넘어갔을 때 전세보증금이 8000만원 이하인 경우에만 최우선변제금으로 2700만원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관은 A씨와 이웃이기도 했던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관계자 등의 손에 들려 운구차에 실렸다. 아버지와 여동생, 대책위 관계자들은 고개 숙여 목례하며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20일 오전 인천시 중구 인하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전세사기 피해자 A씨(31·여)의 관이 운구차에 실리고 있다. 연합뉴스

A씨는 지난 17일 오전 자택에서 손글씨 유서를 남기고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됐으나 결국 숨졌다. 대책위 관계자는 “유족들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며 언론 인터뷰를 정중히 거절했다.

A씨는 세 번째로 숨진 전세사기 피해자다. 앞서 지난 2월 28일과 지난 14일에도 건축왕으로부터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20·30대 피해자 2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