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섬 어린이와 놀이공간] 만들고 부수고…‘건축 놀이’의 왕국

입력 2023-04-13 17:50 수정 2023-07-04 15:44
미국 버클리 마리나 쇼어버드 공원에 위치한 모험놀이터. 한해 8만 명이 찾지만 기자가 방문한 지난해 10월 31일은 핼러윈 축제로 놀이터가 텅 비어 있었다. 문정임 기자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시에서 차를 타고 바닷가 방향으로 10분쯤 달리면 요트 정박항인 버클리 마리나에 도착한다. 샌프란시스코 만(灣)이 광활한 해안선을 드러내고, 금문교와 샌프란시스코 시내가 멀리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주차장을 지나 쇼어버드 공원으로 들어서면 대형 망치와 톱 조형물이 달린 놀이터 입구가 보인다. 이곳이 ‘버클리 마리나 모험 놀이터’다.

버클리 마리나 모험 놀이터는 입구를 장식한 조형물이 말해주듯 건축 놀이를 특화한 곳이다. 문을 열면 각종 건축 도구가 보관된 창고가 있다. 아이들이 작업하는 테이블이 있고, 놀이터 곳곳에 폐목재를 크기별로 쌓아두었다. 헌 피아노와 나무배, 진공관처럼 생긴 거대한 파이프 등은 놀이터 전체를 잡동사니를 모아둔 창고처럼 보이게 해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작업로 사이에는 나무와 폐타이어, 그물 등으로 만든 놀이 구조물이 있다. 30m가량 되는 집라인도 있다.

놀이활동가 앤서니(Anthony)가 각종 건축 자재가 보관된 놀이터 창고를 보여주고 있다. 문정임 기자

창고에 비치된 페인트. 아이들은 자신이 만든 공작물에 색도 입힐 수 있다. 문정임 기자

이곳을 찾은 부모는 입구에 비치된 방명록에 이름과 방문 시간을 기록하고, 자녀가 다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항에 서명해야 한다. 사고 책임 여부를 놓고 소송이 빈번한 미국에서 논쟁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다.

놀이터에 들어온 아이들은 놀이활동가들이 대기하고 있는 스태프 존에서 구조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도구를 지급받는다. 도구 통에는 톱, 망치, 못, 자, 앞치마, 안전모, 나무를 고정하는 클램프가 들어 있다.

아이들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거나 해체할 수 있다. 페인트로 색칠도 할 수 있다. 완성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결과물은 원하면 집으로 가져갈 수 있다.

고용된 놀이활동가는 모두 5명이다. 주중과 주말을 나눠 근무한다. 아이들에게 도구를 나눠주고, 톱과 같이 위험한 도구를 사용할 때 안전한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역할을 한다. 또 이곳에서 가장 위험한 도구인 못을 수거하는 일도 한다.

이곳은 부모와 아이가 함께 이용하면 무료이지만 아이만 두고 부모가 긴 시간 자리를 비울 때는 하루에 10달러를 내야 한다. 보육의 목적으로 아이를 맡기는 경우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운영 시간은 오후 5시까지다. 모든 폐목재는 지역 시민들이 무료로 기부한 것들이며, 놀이활동가 급여는 버클리시가 지급한다.


버클리 마리나 모험놀이터에는 플레이 워커와 아이들이 함께 만든 놀이 구조물들이 있다. 문정임 기자

버클리 마리나 모험 놀이터는 7세 이상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더 어린아이도 이용할 수 있다. 놀이 구조물이 있기 때문이다. 기성품이 아니다. 나무를 연결하거나 다른 놀이시설에서 구조물 일부를 가져와 덧대 ‘완성해 가는 중인’ 것들이다. 언덕을 따라 설치한 긴 미끄럼틀, 나무로 만든 전망대 등 건축 활동을 하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재료는 충분하다.

1970년대 버클리시는 부둣가에 위락 항(marina)을 조성해 일대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했다. 하지만 찾는 이가 적자 가족 단위 방문객을 유인하기 위한 방안으로 모험 놀이터를 조성했다.

교외로 아이들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시내 동네 놀이터와는 달라야 했다. 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덴마크 코펜하겐에 세워진 폐자재 놀이터(세계 최초의 모험 놀이터)가 아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을 기억해 공작을 특화한 모험 놀이터를 개장했다. 미국에선 몇 곳 없는 모험놀이터 중 한 곳이다. 개장 후 40년이 넘은 지금도 한 해 8만 명의 아이들이 이곳을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어린이가 만든 자동차. 여러 크기의 나무 조각을 못으로 박아 완성했다. 문정임 기자

모험 놀이터의 가장 큰 특징은 놀이 활동이 비구조적이고 비정형적이라는 것이다. 가변적인 놀이 재료가 많아서 아이들은 무엇을 할지 결정만 하면 된다.

모험 놀이터는 재미도 있지만 유익하기도 하다. 놀이 과정 자체가 삶의 기술을 배우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나무로 집을 지으면서 못을 박을 때에는 집중해야 손가락을 다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붕은 비가 고이지 않게 비스듬히 고정해야 좋고, 사선으로 버팀목을 넣어야 구조물이 더 튼튼하다는 사실도 배운다. 나사와 못의 차이, 손이나 키 등 자기 신체를 기준으로 사물의 크기를 어림잡는 방법도 알게 된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원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이곳을 세계 10대 놀이터 중 하나로 선정했다.

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