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부활절은 14일이 늦어졌다. 왜?” “예수님도 자가격리를 하셔야 했다.”
아마도 머지않은 날 이런 조크를 하며 웃을 것이다. 성경 시대에도 가장 소중한 절기가 늦추어진 때가 있었다. 당시엔 무려 한 달이었다. 그 이유가 흥미롭다. 제사장도 부족한 데다가 백성도 예루살렘에 많이 모이지 못했다.(대하 30:2~3) 나는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다시는 ‘지각 절기’가 없게 해 달라고.
2023년 4월 9일. 우리는 3년간 지키지 못했던 부활절을 지키게 된다. 3일부터는 고난주간을 지키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길고 길었던 한 주간이다. 고난주간엔 대부분 교회가 일주일간 새벽기도회를 갖는다. 칸타타를 준비하기도 한다. 어떤 교회는 구운 달걀을 포장해 나누기도 할 것이다. 코로나 이후 첫 부활절, 어떻게 보내는 게 좋을까.
앞선 지각 절기를 지키는 히스기야 왕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전갈을 보내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에는 특별히 각각 ‘편지를 보내 초청’했다. 우리도 특별한 초청장을 마련해 볼 수 있을까. 이미 추억이 돼 버린 크리스마스 카드를 부활절 카드(엽서)로 부활시켜 보는 일이다.
정성스러운 손편지는 언제나 큰 감동을 안겨 준다. 미국은 매년 1월 23일을 ‘손글씨의 날’로 지킨다. 인간이 손으로 글씨를 쓴다는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동안 교회를 떠나 있던 가나안 성도들과 환우들, 구도자들에게 보낼 수 있겠다. 손편지의 초청장은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증명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미국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도 이따금 말에서 내려 달려온 쪽을 바라본다. 너무 빨리 달려 자신의 영혼이 못 쫓아올까 봐 기다리는 것이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주간은 ‘안단테’(느리게) 삶으로의 초대다.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운 주간이다. 1990번째 부활절을 잘 맞이할 수 있는 팁을 몇 가지 소개한다.
무덤 멍 때리기
‘한강 멍 때리기 대회’로 시작된 ‘멍상’(명상과 다른)은 어느새 ‘숲멍’과 ‘불멍’, 그리고 ‘물멍’으로 번졌다. 거기다 구름멍, 명언멍… 그뿐인가. 반려견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멍멍’까지. 멍상은 특별한 수련 없이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일상의 명상’이다.
나는 멍상 중 멍상은 ‘무덤 멍’이라 여긴다. 무덤에 선다. 비로소 내가 필멸자(必滅者)라는 것을 안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다. 죽음이 깊이 묵상 될 때 부활의 의미는 더 커진다. 묘지를 찾아보자. 한국에서 시작된 손가락 하트(finger heart)는 한국의 최대 문화 수출품 중 하나가 됐다. 고난주간 멍 때리기가 선교 도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무덤멍의 명소로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경기도 양평의 안데르센 공원묘원을 추천한다. 안데르센 공원묘원은 소아암과 백혈병 등으로 사망한 아이들을 위한 무료 묘지이다. 아이들의 죽음 앞에 서면 비로소 1인칭 죽음이 다가온다.
하루 한 끼 금식하기
김화성 동아일보 기자는 말한다. “사람의 창자는 하나의 생산라인이다. 입과 항문은 인풋(input)과 아웃풋(output)일 뿐이다. 인간과 지렁이의 생산라인이 하나도 다를 게 없다. 밥은 곧 똥이다. 밥이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 항문에 이르면 똥이 된다. 사람은 짐승과 무엇이 다른가.”
그의 말대로 인간은 자칫 ‘밥버러지’가 될 수 있다. 금식은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하는 가장 좋은 도구다. 나를 나 되게 한다. 하루 한 끼든 일주일에 한 끼든 ‘먹는 몸에서 굶는 몸으로’ 전환해 보자. 그때 우리는 진정한 비움과 채움을 알 수 있다. 몸이 비워지면 영성은 깊어진다. 비울수록 채워지는 것이 영성이다.
매일 세 번 습관처럼 수저를 드는 그 시간에, 손에 수저를 드는 대신 손을 모아 보자. “오 하나님, 굶주린 자들에게는 빵을 주시고 빵을 가진 우리에게는 정의에 대한 굶주림을 주소서.” 어느 라틴 아메리카인의 기도이다.
올해의 금식으로 모아진 돈은 밥퍼(최일도 목사)나 성경의 벽 세우기(양평의 K-바이블)에 후원할 것을 추천한다.
고요를 체험하기
현대인의 특징은 ‘중독’이다. 누구는 권력에, 누구는 돈에, 누구는 인기에 중독돼 산다. 고대 로마 법정에서는 잡혀서 감금된 노예나 주인에게 넘겨진 사람을 ‘중독자’라고 했다. 여기서 중독자란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상실한 사람이란 뜻이다.
신인류는 미디어와 스마트폰에 중독되어 산다. 현대인들은 하루 221번, 매일 평균 3시간 15분, 1년에 약 1200시간 동안 스마트폰에 매달려 있다. 무려 50일 밤낮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시인 박노해는 ‘중독자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독은 끊을 수 없다/ 중독이 그를 죽이거나/ 한 30년 침묵과 잊혀짐으로/ 스스로 죽어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미디어 금식이라 불러도 좋겠다. 책을 붙잡자. 책 중의 책은 산책이다. 숲은 또 하나의 서재(書齋)다. 그곳에서 고요를 연습하자. 자연은 성경 이전의 성경이다.
명산이 아니라도 좋다. 멀리 숲마실을 떠날 수 없다면 집 가까이에 있는 숲을 찾아 나서자. 고요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창조회복 운동에 동참하기
밥에도 계급이 있다. ‘수라’(水剌)는 임금이 먹는 밥이다. 양반이나 어르신이 먹는 밥은 ‘진지’다. 하인이 먹는 ‘입시’가 있고 죄수들이 먹으면 ‘구메’가 있다. 밥뿐인가. 죽어서도 누구의 죽음은 ‘사거’(死去)도 모자라 ‘서거’(逝去)가 되고 누구는 ‘졸’(卒)이 되고 ‘사’(死)가 된다. 기후위기 물가위기 취업위기, 거기다 감염병 재난도 있다.
하지만 다양한 재난을 마주하는 모습은 한결같다. 누구도 예외 없이 연대해야 한다. 피조물의 고통에 공감하며 그 사랑을 ‘탄소 중립’으로 드러낼 수는 없을까. 탄소발자국 줄이기(주일 대중교통 이용하기, 전등 끄기, 실내 적정온도 유지하기 등), 쓰레기 줄이기가 대표적이다. 줍깅(plogging)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혁명 그 자체는 작은 일이 아니지만 작은 일에서 발생한다.” 작은 일부터 시작해보자. 부활절 혁명은 그렇게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