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금융가를 공포로 몰아넣은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재현할 새로운 금융위기의 시작일까. 아니면 기약 없이 이어진 경기 둔화의 바닥을 찾아가는 불확실성의 끝일까.
SVB 파산 사태를 놓고 시장에서 엇갈린 반응이 나오고 있다. ‘블랙 먼데이’를 불러올 것이라는 지난 주말 세계 금융가의 우려와 다르게 13일 개장한 아시아 증권시장은 낙폭을 최소화했고, 미국 뉴욕증시 선물과 암호화폐 시장은 상승세로 돌아섰다. 미국 정치권까지 나선 사태 수습과 연방준비제도(연준)의 ‘빅스텝(0.5% 포인트 금리 인상) 불가론’이 맞물려 시장의 공포를 완화한 것으로 보인다.
SVB와 리먼의 차이점은 ‘시스템 리스크’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타임스를 포함한 미국 일간‧경제지들은 SVB 파산 사태와 2008년 금융위기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점으로 ‘시스템 리스크’를 지목했다. 15년 전 금융위기의 경우 미국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의 부실이 되돌아오면서 금융기관의 줄도산을 일으켰고, 결국 월스트리트 4대 은행이던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이어졌다.
반면 SVB는 초우량 안전자산인 미국 장기국채에 투자했지만, 가파른 인플레이션과 연준의 고강도 긴축 기조에 따른 재무구조 악화로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에 휘말렸고 파산까지 도달한 점에서 리먼브러더스와는 배경과 과정이 다르다는 게 월스트리트 금융가와 미국 언론들의 진단이다.
따라서 SVB 파산 사태가 금융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은 ‘리먼 사태’ 당시보다 낮다는 분석이 금융 전문가들의 중론으로 모아지고 있다. 미국 플로리다대 제이 리터 교수는 워싱턴포스트에 “SVB 파산 사태는 상환 능력 이상으로 지출한 사람들의 탐욕으로 초래된 2008년의 상황과 차이가 크다. SVB 사태의 근본적인 문제는 최근의 금리 인상”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SVB의 파산을 일으킨 요인으로 지목된 건 미국의 유동성 위기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 본사를 둔 SVB는 미국 정보기술(IT)의 화수분인 실리콘밸리에서 스타트업들과 거래하며 자금줄 역할을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대유행에서 인플레이션과 탈세계화가 찾아왔고, 연준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공격적으로 인상했다. 이런 고물가·고금리 환경에서 가장 먼저 위기와 마주한 건 미래의 성장성을 현재의 손실과 맞바꿔 온 스타트업들이다.
실래콘밸리 스타트업들과 거래한 SVB는 유동성 위기를 피하지 못했다. 미국 국채 위주의 매도가능증권(AFS)을 매각하면서 18억 달러 규모의 손실을 봤다. 결국 미국 캘리포니아주 금융보호혁신국은 지난 10일 SVB를 폐쇄하고 자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파산 관재인으로 임명했다.
“SVB 사태는 빙산의 일각, 공매도 움직일 것”
SVB 지주사 SVB파이낸셜그룹은 지난 10일 마감된 나스닥거래소에서 106.04달러까지 60.41%(161.79달러)나 폭락했다. 나스닥거래소는 그 이튿날인 지난 11일 SVB파이낸셜그룹의 거래를 중단했다. 이로 인해 월스트리트 일각에서 중소형 은행과 스타트업들의 ‘연쇄 부도’로 이어질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미국 경제학자인 미주리‧캔자스시티대 교수 마이클 허드슨은 지난 12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기고에 “실버게이트와 SVB 사태는 빙산의 일각과 같다”고 평가했다. 실버게이트는 SVB 파산 직전인 지난 9일 영업을 중단한 암호화폐 취급 은행이다. 지주사인 실버게이트캐피털은 SVB와 마찬가지로 유동성 위기에서 은행 부문 사업을 청산했다.
미국 투자자문사 웨일런글로벌어드바이저스의 리처드 크리스토퍼 웨일런 의장은 같은 날 로이터통신에 “뉴욕증시에 당장 큰 위험이 닥칠 수 있다. 공매도 투자자들은 소형은행을 공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SVB는 영국 중국 인도를 포함한 11개국의 해외 영업망을 두고 있다. 이로 인해 각국 월요일 아침 은행과 증권시장이 개장하면 위기가 시작될 것이라는 우려가 지난 주말 내내 팽배했다. 영국 180여개 IT기업은 지난 주말 자국 재무장관 제러미 헌트에게 서한을 보내 “월요일에 (은행과 증권시장이 개장하면) 위기가 시작될 것”이라며 정부의 개입을 요구했다.
영국 교육소프트웨어 스타트업 링구미 관계자는 “회사 현금 85%가 SVB에 예치돼 있다. 우리는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다”고 말했다.
“경기 둔화 불확실성 해소, 저점 잡아갈 것”
하지만 증권을 포함한 주요 자산시장은 세계 금융가의 우려와 다르게 움직였다. 월요일 장을 진행한 아시아 주요 증시는 대체로 낙폭을 방어했고, 우리 증시의 경우 상승 마감했다. 코스피지수는 0.67% 상승한 2410.6, 코스닥지수는 0.4% 오른 788.89에 마감됐다.
코스피‧코스닥이 마감한 이날 오후 3시30분 기준 미국 뉴욕증시 선물시장에서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는 1.31% 오른 3만2335,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는 1.81% 상승한 3932.75를 가리키고 있다. SVB 사태의 여파를 가장 크게 맞은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 선물지수는 같은 시간 1.92% 뛴 1만2068을 표시했다.
암호화폐 시장의 상승률은 더 가파르다. ‘대장화폐’ 비트코인은 같은 시간 미국 암호화폐 시가총액 정보 사이트 코인마켓캡에서 24시간 전보다 8.78% 급등한 2만2382달러(약 2916만원)를 국제 시세로 집계했다. 1주 전과 비교해도 0.15% 올랐다.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 빗썸에서 비트코인 매매가는 2943만원이다.
SVB 사태의 파장을 최소화하려는 미국 정부와 연준의 정책적 대응이 연달아 나오면서 뉴욕증시 선물지수와 암호화폐의 동반 강세를 이끈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 재무부, 연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이날 SVB의 고객 예금을 보험 한도와 상관없이 전액 보증하고, 유동성 위기에 놓인 금융기관에 대출을 집행할 계획을 발표했다.
연준은 은행에 유동성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Bank Term Funding Program‧BTFP)을 조성한다. 이를 통해 미국 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을 담보로 내놓는 금융기관에 1년간 자금을 대출할 계획이다.
연준의 이런 조치는 미국 동부시간으로 오는 21일부터 이틀간 진행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E) 3월 정례회의를 열흘 정도 앞두고 이뤄졌다. 미국의 기준금리는 이 회의를 통해 결정된다. 현행 4.5~4.75%인 기준금리가 이 회의에서 0.5% 추가 인상될 것이라는 시장의 예상이 우세했지만, SVB 사태를 계기로 상황이 달라졌다.
시장의 의견은 이미 ‘빅스텝 불가론’ 쪽으로 기울었다.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의 차기 금리 인상률 전망에서 한국시간으로 오후 3시30분 현재 ‘빅스텝’을 택한 비율은 ‘제로’(0%)가 됐다. 한때 70%를 넘겼고, 이날 오전 7시20분만 해도 39.5%였던 전망이 완전히 사라졌다.
‘베이비 스텝’(0.25% 포인트 금리 인상) 전망은 93.7%, 동결 의견은 6.3%다. 기존에 없었던 ‘금리동결론’이 SVB 사태를 계기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최홍석 미래에셋증권 대치WM 선임매니저는 이날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증권시장의 관점에서 SVB의 파산은 새롭게 찾아온 악재보다 기술주의 불확실성 중 중요한 부분을 걷어낸 재료에 가까워 보인다. 2021년 말부터 시작된 나스닥의 하락장에서 바닥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최 선임매니저는 유튜브 경제 채널에서 ‘최파고’라는 별명으로 활동하면서 자산시장의 3대 악재로 ‘이머징 테크놀로지(신기술)’ ‘암호화폐’ ‘밴처캐피털’을 지목해왔다. 그는 “지난해 내내 이어진 나스닥의 하락장에서 이머징테크 버블, 같은 해 11월 FTX 거래소 파산으로 암호화폐 버블이 각각 붕괴됐다. SVB 파산은 이제 밴처캐피털 버블 붕괴를 목격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