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오페라발레 역사상 첫 흑인 에투알, 서울에서 탄생

입력 2023-03-12 12:14 수정 2023-03-12 20:16
파리오페라발레의 ‘지젤’ 내한 공연에서 기욤 디옵이 11일 지젤 역의 도로테 질베르와 연기하고 있다. 이날 공연이 끝난 후 디옵은 에투알(수석무용수)로 지명됐다. LG아트센터 제공

“파리오페라발레 무용수들의 삶에는 매우 희귀하고 집단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은 공연 후에 관객들과 함께합니다. 그것은 바로 꿈의 실현인 에투알 지명입니다. 기욤 디옵을 에투알로 임명합니다.”(호세 마르티네즈 예술감독)

서울에서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POB)의 새로운 ‘별’이 탄생했다. 11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열린 POB ‘지젤’ 낮 공연 커튼콜 무대에서 마르티네즈 예술감독이 예고 없이 새로운 에투알(수석무용수)을 발표한 것이다. 주인공은 이날 알브레히트를 연기한 기욤 디옵(24).

올해 쉬제(솔리스트)로 승급한 디옵으로서는 프르미에 당쇠르(퍼스트 솔리스트)를 건너뛰고 최고의 자리로 직행한 순간이었다. 게다가 그는 파리오페라발레 역사상 에투알이 된 흑인 무용수라는 기록도 가지게 됐다. 예상치 못한 깜짝 발표에 디옵은 눈물을 흘리며 관객과 동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고, 관객들은 열렬한 환호로 디옵의 승급을 축하했다.

기욥 디옵이 11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열린 POB의 ‘지젤’ 낮 공연 커튼콜 무대에서 에투알로 임명된 이후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LG아트센터

POB 무용수들은 카드리유(군무진)-코리페(군무 리더)-쉬제(솔리스트)-프리미에 당쇠르(퍼스트 솔리스트)-에투알(수석무용수)의 5등급으로 나뉜다. 프랑스어로 별을 뜻하는 에투알은 다른 등급과 달리 승급 시험 없이 예술감독의 추천을 받아 파리 국립오페라극장 총감독이 지명한다. 마르니테즈 예술감독도 이날 “파리 국립오페라극장 알렉산더 니프는 우리와 함께할 수 없었지만, 그의 동의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디옵의 승급으로 POB 에투알은 2021년 동양인 최초로 에투알이 된 박세은(34)을 포함해 총 18명이 됐다.

해외 공연이 많지 않은 POB의 특성상 에투알 지명이 프랑스 이외 지역에서 이뤄지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이번 지명을 본 한국 발레팬들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됐다.

파리오페라발레의 ‘지젤’ 내한 공연에서 기욤 디옵이 주인공 알브레히트를 연기하고 있다. 이날 공연이 끝난 후 디옵은 에투알(수석무용수)로 지명됐다. LG아트센터 제공

프랑스인 어머니와 세네갈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기욤은 2012년 파리오페라발레학교에 입학했고 2018년 POB에 입단했다. 어린 나이에도 일찌감치 에투알이 하는 역할을 맡으며 차세대 스타 탄생을 예고했다. 특히 에투알이 부상이나 코로나19로 빠지게 되면 그는 바로 대타로 주역을 맡았다. 이번 투어 역시 원래 알브레히트 역을 맡기로 했던 위고 마르샹(30)의 갑작스러운 무릎 부상으로 대타로 나섰다. 하지만 디옵은 대타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알브레히트를 훌륭히 연기해냈다.

POB는 ‘태양왕’ 루이14세 시절인 1669년 창단,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발레단이다. 350년 넘는 긴 시간 동안 세계 발레계를 이끌어 왔지만 오랫동안 유럽 중심의 순혈주의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인종적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특히 2020년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의 살해로 벌어진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을 계기로 발레단 내부에서 다양성 부족에 대한 비판 성명서가 발표됐을 정도다.

POB는 빠르진 않지만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에 대한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런 흐름 속에서 지난 2021년 아시아 출신 최초 에투알 박세은에 이어 이번에 흑인인 디옵을 에투알로 지명했다. 이날 프랑스를 비롯해 해외 언론은 디옵이 흑인 무용수로서 첫 에투알이 된 것에 의미를 부여한 기사를 내보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