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벽은 높고도 단단했다. 마운드는 풍부한 깊이를 자랑했고 타선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대표팀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투지를 보였지만 정신력만으로 극복하기엔 버거운 격차였다.
한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10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본선 B조 1라운드 일본과의 맞대결에서 13대 4 역전패를 당했다. 일본은 전날 중국전에 이어 이날도 승리를 챙기며 조 선두 8강 진출을 사실상 예약했고 한국은 2연패에 빠졌다.
일본의 일방적 우세가 예견된 경기였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최우수선수급 성적을 내는 투타 겸업의 오타니 쇼헤이를 필두로 쟁쟁한 투수와 타자들이 엔트리에 포진했다. 외신과 전문가들도 일찌감치 일본을 이번 WBC 우승 후보국으로 꼽았다.
그렇기에 대표팀의 초반 선전은 눈부셨다.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오른 김광현은 2회까지 삼진 5개를 잡아내는 괴력투로 진가를 증명했다. 타선에선 3회 초 강백호의 물꼬를 트는 2루타에 이어 양의지가 2점 홈런을 날렸다. 대표팀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상대 실책과 이정후의 적시타까지 묶어 리드를 3점 차로 벌렸다. 메이저리그 통산 95승에 빛나는 다르빗슈 유를 상대로 거둔 성과였다.
문제는 다음 수비였다. 선두타자로 나선 겐다 소스케의 볼넷을 시작으로 볼넷과 안타, 2루타가 이어졌다. 점수는 순식간에 1점차로 좁혀졌다. 벤치는 교체를 단행했다. 마운드에 오른 원태인은 오타니 쇼헤이를 고의사구로 거른 직후 상대 4번 타자를 내야 뜬공으로 요리했지만 후속 요시다 마사타카에게 통한의 역전 중전 적시타를 허용했다.
한 번 빈틈을 포착한 일본 타선은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 들며 추가점을 올렸다. 그 동안 다르빗슈에 이어 등판한 계투진은 ‘철벽 연투’를 폈다. 6회 박건우가 때려낸 솔로 홈런은 한국이 이날 낸 마지막 점수였다.
표면적으론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던 균형의 추는 6회 말 급격히 무너졌다. 경험이 부족한 젊은 투수들의 제구 난조는 안 그래도 위협적인 상대 타선에 기름을 부었다. 6회 5점, 7회 2점을 내준 대표팀엔 더 이상 쫓아갈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투수진은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선발 포함 도합 10명의 투수가 이날 마운드에 올랐다.
경기 직후 이강철 감독은 패인을 본인의 운영 실수 탓으로 돌렸다. 3회 흔들리기 시작한 김광현을 너무 늦게 바꿔준 나머지 역전을 허용했고, 한 번 잡았던 승기를 내줬다는 것이다. 가능성을 보인 타선엔 칭찬을, 젊은 투수들을 향해선 격려를 건넸다. “아직 두 경기 남았다. 남은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도 강조했다.
완패였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태도는 박수 받아 마땅했다. ‘적지’를 찾은 한국 응원단은 도쿄 돔을 가득 메운 4만여명의 관중과 이날 시구자로 나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앞에서 끝까지 목청을 높여 응원했다. 이미 경기가 크게 기울어진 8회 박해민이 끈질기게 공을 커트해내며 10구 승부까지 가는 투지를 보이자 응원 소리도 절정에 달했다.
이날 패배로 궁지에 몰린 이강철호엔 오직 한 가지 8강에 진출할 경우의 수가 남았다. 전제조건은 일본의 전승, 중국의 전패다. 여기에 대표팀이 오는 12일과 13일 연달아 열리는 체코·중국전을 이기고 체코가 호주를 잡아 준다면 한국 호주 체코 3개국이 2승 2패로 동률을 이뤄 상호간 맞대결에서 누가 더 실점을 많이 했는지 따져 8강 진출국을 가리게 된다.
도쿄=송경모 기자 ss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