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그날의 두려움

입력 2023-03-10 16:20 수정 2023-03-10 22:19

어느 날 삼십 대의 청년이 헐레벌떡 미용실로 들어서더니 미용실의 분위기를 파악하려는 듯 두리번거렸다.
“파마 하러 왔소.”
“네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유니폼을 입으셔야 하는데요.”
“그냥 해요 뭐가 씨 이렇게 복잡해.”
“네 그래요. 하지만 머리를 감아야 파마를 할 수 있습니다.”

거칠고 억센 그의 모습을 무섭게 느끼면서도 직원들은 억지로 웃는 모습을 보이며 태연한 척 했다. 그는 무슨 일인가를 크게 저지른 것 같았다. 그리고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20여 명이 넘는 직원들 얼굴에 근심 빛이 드리웠다.

더욱이 우리가 놀란 것은 그의 바지 여기저기에 시뻘건 피가 묻어있었다. 유난히도 바쁜 오후 저녁 모임을 갖기 위해 각계각층의 다양한 고객들이 단장을 마무리하는 분주한 시간이었다. 왠지 불안해서 귀금속 목걸이나 반지를 착용한 이들에게는 어깨 보를 둘러서 보이지 않게 했다. 다행히도 B홀은 A홀보다 안쪽에 있어 그 청년을 깊숙한 B홀에 앉게 했다. 그의 눈치를 살펴 가며 메모를 전해서 밖에 경비 몇 사람을 대기시킬 수가 있었다.

살며시 밖으로 나가 경찰에 신고하려는 눈치를 주는 직원을 만류했다. 그것은 후일 이 염려되기도 했지만 아직 크게 손해 입은 일도 없는데 공연히 선입견 때문에 자칫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마 시술 작업 중에도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화장실에 다녀왔다. 바지가 젖어있었다. 아마도 바지에 묻어있던 피를 지우려 했던 것 같았다. 파마가 끝나기까지 참으로 불안한 시간이 흘렀다. 마무리되자마자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계산을 하려는지 성큼성큼 카운터 앞에 다가섰다.

“삼만 원입니다.”
“나 돈 없어 이 X년아!” 하며 때리려 하더니 갑자기 주머니 속으로 손이 들어가려 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급하게 오다 보니 못 챙기셨죠, 사정을 잘 몰라서 그래요. 나중에 내시고 그냥 가세요.”

그는 현관을 나서자마자 좌우를 휘둘러보더니 쏜살같이 뛰기 시작했다. 멀찌감치 대기 중이던 경비들은 안에서 인질극이라도 벌어지지 않나 하고 노심초사했다고 하였다. 그가 떠난 다음 카운터의 직원과 그의 머리를 맡았던 디자이너는 나를 붙들고 울기 시작했다.

사정을 알고 있는 몇몇 고객들은 직원들이 침착하고 지혜로웠다면서 칭찬을 해주었으나 우리 직원들은 그 청년이 일어서 떠나기까지 공포에 떨면서 작업을 했다. 미용실에 강도가 들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도 있었다. 만일을 대비해서 고객들의 핸드백을 장 속에 넣고 열쇠를 밖으로 내보내려 했었다.

그가 샴푸를 하는 틈을 타서, 한 사람씩 귓속말로 수상한 사람이 들어왔다고 설득했지만 그중에 몇 사람은 한사코 가방을 붙들고 맡기기를 꺼렸다. 하기야 핸드백은 자기 자신이 사물함에 넣고 잠그는 것이 원칙인데 갑자기 귓속말로 이상한 사람이 들어왔으니 가방을 사물함에 넣겠다고 하니 오히려 직원들이 의심받는 입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순간! 그 청년이 눈치챌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답답했다. 위기 앞에서 튀어 나오는 두려움은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날 하마터면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큰 피해를 주지 않고 그는 줄행랑을 쳤다. 참으로 감사했다. 십년감수 했다는 고객들의 한숨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저런 강도 같은 놈은 삼청교육대로나 보내야 한다면서 저런 놈 낳고도 미역국을 먹었냐며 고객들은 분노했다. 그는 왜 왔을까, 왜, 무슨 큰 죄를 지었을까, 그에 대한 아무런 확신이 없었으나 그가 어두운 그림자로 우리 업소를 침입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변장을 하기 위해서 들어왔을 것이다. 헤어스타일도 웨이브를 많이 넣어달라고 주문까지 한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열한 명의 형제 속에서 자랐다. 내 위로 다섯 명의 오빠와 아래로 또 다섯 명의 아우가 있다. 가난은 나라도 구할 수 없다는 말은 다른 집안의 말이 아니었다. 대하드라마 두 세 편도 써 내려갈 소재가 충분한 소설 속의 주인공이 비단 나뿐이겠는가! 어린 시절 자주 듣던 말, 아들이 둘이면 도둑놈에게 삿대질 말고 딸이 둘이면 접대부나 창녀를 비웃지 말라 하시던 동네 어른들과 내 부모님의 덕담이 종종 생각난다.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려고 오신 예수님 앞에 랍비와 바리새인들이 창녀를 데려와 일제히 돌로 치려 할 때, 빛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

그 말씀을 하시며 주님은 땅에 어떤 말씀을 쓰셨을까. 그들은 왜? 그 글을 읽고 나서 들었던 돌을 떨어뜨리고 돌아갔을까. 나는 상상해 보았다. “그대 선생이여 그대는 어젯밤에도 어디서 누구와 간음했고, 랍비여 너는 오늘도 그녀와 간음하고 여기 왔느니라.”
그렇게 구체적으로 그들 이름까지 땅에 기록 하셨을까? 무슨 일로 양심의 가책 받아 돌을 내려놓고 하나둘 모두 물러갔을까.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정결하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

나는 어른들이 하시던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나에게도 두 아들이 있고 사랑하는 딸과 후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직 젊고 청춘인데 내가 그들의 미래를 어찌 관통하겠는가, 그저 후손들을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정죄하지 않은 지체들을 우리가 무엇이라고 비난하겠는가.

그가 쏜살같이 뛰는 뒷모습은 누구에게 쫓기는 것이 분명했다. 근사하게 해주었더니 요금도 안 내고 마치 강도처럼 겁을 주고 행패를 부리려 했는데도 그러나 왠지, 그 청년이 구제 불능의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이었던 톰 행크스는 자폐아였지만 그는 늘 뛰고 있었다. 그 청년도 무거운 죄 짐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삶에 목표를 설정하고 뛰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가 도망치다 불식 간에 붙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레미제라블에 장발장처럼 한 조각 빵 때문에 시작된 실수는 아니었을까. 그를 계속 추격하는 자베르 같은 사람을 만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나타나길, 부디 더 큰 사고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었다. 그가 자수하여 스스로 죗값을 치르기를 구하고 있었다. 더딘 출발일 찌라도 새 마음으로 미래의 새로운 길을 향해 질주하기를 비는 마음으로 그가 뛰고 있는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씻기어 지리라>

새벽에도 우물가로 간다
밤새 몸속에 도사린 노폐물
슬금슬금 비집고 나왔을까
부지런히 물을 퍼 올려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고
수족 마디마디를 씻는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어린 염소 떼의 등허리처럼 빛난다
씻어야 정신이 살아있는 것이다
쌀알같이 정갈한 엄마의 치아,

저녁에도 또 씻는다
무엇을 구하러 진종일 다녔는지
해 저문 저녁 귀갓길에는 빈손,
슬그머니 밀어 올린 상념들,
고뇌와 번민의 봇짐이 무겁다
달라붙은 진득이 들
털어내려고 또 씻는다
보지 말아야 할 것과
듣지 말아야 할 것들
말끔히 씻어내려는 청빈한 맘

묵은 떼가 콜타르처럼 굳어
내 의지를 흔들어 후비고
내 영혼을 엿보며 기웃거린다
매일 씻어내고 씻는 일
언제까지 이어질지,
오염 없는 엄마의 양수 같은
신비한 생명수에 나를 적시면
내 영육 거듭나리
주님 부르실 그 날까지
쉼 없이 계속 씻기어 지리

◇김국에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정리=

전병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