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받아들고
청소년기 저의 정신 활동은 대부분 편지를 통해 이루어졌고, 신앙과 사랑과 인생을 전부 편지로 배웠다 해도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목사가 목사에게’(IVP)라는 책은 말 그대로 편지글 모음집이라 몹시 반가웠습니다. 저는 열다섯 개의 편지 중 한 편지의 수신자이고 출판사와 가장 근거리에 살기에 첫 독자가 되는 영광까지 얻었습니다. 책을 받자마자 어떤 분들의 편지가 있을까 이름을 살폈습니다. 연배와 신학, 교단과 배경이 모두 다른 목사님들이셨습니다. 실제로 뵌 적은 없지만, 마음의 스승 같은 선배 목사님들이 가득했습니다. 순간 작고 아담한 책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분량은 얼마 되지 않으나 술술 읽기는 어려운 책,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메모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책에서 배운 것들
김영봉 목사님이 아들 목사님에게 쓰신 편지를 보면, 당신 아버지께 받은 편지가 맨 먼저 나옵니다. 장로님으로 평생 교회를 섬기며 아들 목사에게 주시는 12가지 당부는 지금 읽어도 무릎을 탁 치게 되는 말씀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다른 편지를 하나씩 읽을 때마다 표현 방법과 삶의 궤적이 다를 뿐, 같은 당부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한평생을 진심을 다해 목회 여정을 걷는 자에게만 새겨 넣으시는 지침이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제 안에는 설교할 때 본문과 주석서를 읽으며 공통분모를 찾는 것처럼 몇 가지 원칙이 새겨졌습니다.
첫째, 목회는 가장 먼저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의 목양을 받는 사람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하나같이 목회의 여정은 고독하고 외로우며 필연적으로 한계에 부딪히고 절망과 탄식에 나오게끔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하여, 목회는 주님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된 성도가 되려는 평생의 분투가 없으면 목회자는 치명적인 유혹에 노출되거나 매너리즘에 빠져 서서히 무너져 간다는 말씀입니다. 편지마다 저 자신의 목회 여정을 돌아보게 만드는 소위 ‘뼈 때리는’ 문구들이 들어 있어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목회자는 성도를 위해 존재하며 언제나 성도를 향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수단과 도구로 보지 않고 존재로 보는 목사가 되라. 목회에 대한 인간적 자신감이 생길 때, 사람이 수단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지. 너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한 영혼을 온 마음 다해 돌보는 목사로 남아라”(146쪽). 제게 보내신 김관성 목사님의 당부입니다. 그렇습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성도들을 자기 증명의 도구로 삼아 승승장구하는 목회를 맞이할 때입니다. 항상 소외된 사람들, 교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쏟는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해 봅니다.
셋째,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가장 즐거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김지철 목사님의 말씀이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목회자는 예배하고 말씀을 증거할 때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찌할꼬?’라고 탄식할 때, 새벽에 말씀을 선포하고 기도하면, 매몰차게 나를 몰아세우던 어제의 그 모든 스트레스의 흔적들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네. 말씀을 통해 깨닫고 경험하는 그 은혜가 내가 받은 스트레스보다 더 컸기 때문이겠지”(165쪽). 목회자들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목회자 모임을 만들고, 다양한 취미 활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말씀을 전하는 일 자체에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해야 한다고 저 또한 믿습니다. 그것이 목사로의 부르심이 주는 특권이기도 하고요.
넷째, 목회자는 처음의 부르심을 간직하는 동시에 부르심이 깊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목회적 소명을 받고 난 후에도 약 10년을 방황하였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부르심을 분명히 각인하고 그 부르심이 자라나는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목사님들의 편지에는 부르심에 대한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독특한 서사와 삶의 궤적을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복음이 자기만의 정황에 맞게 빛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매 순간 붙들어야 합니다. 부르심이 명사가 아닌 동사로 오늘도 역사하도록 생생하도록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간집에는 이 네 가지 원칙 말고도 주옥같은 글귀들이 담겨 있습니다. 줄을 치고 메모하지 않은 장이 없을 정도입니다. 저는 이 책이 한국 교회의 다음 목회자들에게 큰 도전과 귀감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다만 책을 읽는 내내 더 큰 욕심이 제 안에 들어차기 시작했습니다. 이 귀한 글들이 그리고 선배 목사님들의 경험이 바통을 이어갈 차세대 목회자들에게 진정으로 가 닿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편지가 위로와 격려를 넘어 답이 되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청출어람이 가능하려면
최근 새벽마다 마가복음 강해를 인도하며 흥미로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직계 제자가 아닌 마가는 쟁쟁한 사도들을 선생으로 두었으면서도 그 스승들을 꽤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마가가 교회의 위기와 박해 속에서 자신이 배운 예수 복음의 본질을 가지고 마가복음을 써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스승들의 시행착오를 딛고 그다음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청출어람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만큼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를 만들어 내기 어려운 환경도 없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세대를 거듭하며 성장주의에 물들어 갑니다. 개척자가 세운 본질이 사라지니 변질되고 맙니다. 목회자는 기껏 훌륭한 목회를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고 마는 실책을 범합니다. 외형적 성장과 자기 영광을 여전히 성공이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사이, 교회는 깊어질 시간이 없습니다. 푸른색 쪽빛이 더 푸르게 되려면 더 깊은 색의 본질로 들어가야 합니다.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평생을 바쳐 일군 학문을 전부 흡수하여 그다음을 세워 가야 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이루어 낼 수 있는 성취는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스승은 후학들이 자기를 밟고 다음을 써 나갈 수 있도록 마음껏 자리를 만들고 아낌없이 내주어야 합니다. 교회와 목회의 진정한 성숙은 곧 죽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책의 서문에서 김영봉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서간집에 수록된 글들은 이제는 죽을 때라는 고백이다. 우리가 하려고 했던 모든 일들을 죽이자는 호소다. 우리의 인생 프로젝트가 되어 버린 목회를 무덤에 장사 지내자는 결단이다”(10쪽).
죽는다는 것
제가 사랑하는 김관성 목사님이 7년밖에 안 된 교회를 두고 새롭게 개척을 나가셨습니다. 울산에 교회를 세우고 지금 죽어 가고(?) 계십니다. 가끔 만날 때마다 엄살을 피우십니다.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지. 힘들어 죽겠다.” 나를 버리고 간 ‘벌’이라고 농담 삼아 말하지만, 속으로는 눈물이 흐릅니다. 그 결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 개척도 해 본 내가 하는 게 낫다. 너는 나가면 얼어 죽어.” 저는 이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당신이 나가서 죽겠다는 소리니까요. 죽는다는 것은 관념이나 다짐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편지에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우리 교회에는 김관성이 죽은 자리에 새로운 꽃들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죽음을 본 제게도 선택지는 없습니다. 작지만 현실적인 죽음, 그리고 다음을 열 수 있는 비료가 되는 죽음. 그것이 이제 목회의 여정을 막 시작하는 저에게도 과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마음 다해 추천합니다
목회자라면 그리고 신학생이라면, 또한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적잖은 실망을 한 성도들이라면 반드시 이 작지만 무거운 책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담고, 목회 여정을 담아 짜낸 하나님의 편지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 지침을 줄 치고 여러 번 읽어 마음에 새기는 것만으로도 마가에게 일어났던 도약이 일어나리라 기대합니다. 편지를 쓴 사람과 읽는 사람의 진심이 진심으로 맞닿아 다시 한국 교회의 깊은 성숙과 회복이 꽃 피우기를 소망합니다.
“목회 여정에서 네가 하나님께 진심일 때 너와 함께하는 교우들도 진심이 될 수 있단다. 그렇게 진심과 진심이 만날 때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고 건강한 믿음의 공동체가 형성된다고 믿어.”(73쪽)
우성균/ 행신침례교회 담임목사
‘행신교회 이야기’(세움북스) 저자. 연약하고 비루하며 실패하는 인생이어도 하나님이 붙드시면 영광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교회가 참된 가족이 된다면, 복음 안에서 모든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고 믿으며 목사보다 성도가 주인공 되는 교회를 세워 가려 한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