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과 장례식 등 사람이 태어나 평생에 걸쳐 치르는 네 개의 큰 예식 관혼상제(冠婚喪祭). 이런 예식에는 지켜야 한다고 전해져 내려온 절차나 법도가 있다. 이른바 예법인데, 그중에는 고유의 정신이나 의미는 퇴색된 채 시대와 맞지 않는 과거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인데도, 그저 관습처럼 이어지는 것들도 많다.
그러나 ‘다들 그런다’는 이유로 관습을 따르는 대신, 자신의 가치관이나 분명한 이유에 따라 조금은 다른 방식을 택하는 이들도 있다. 결혼식 날 신부 대기실에서 다소곳이 기다리는 대신 신랑과 함께 손님을 맞이한 이애린씨, 장례식장에서 여성 한복 대신 검은 양복 정장을 입고 상주 완장을 찬 서모씨가 그 예다. 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직접 SNS를 통해 공유했다. 남들이 다 따르는 ‘보통’의 룰에 반문을 던지며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보여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하객은 왜 신랑만 맞이하나요?” 나란히 선 신랑 신부의 결혼식
2021년 10월 결혼한 이애린씨의 결혼식은 하객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받았다. 특별히 화려했다거나, 놀라운 이벤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씨는 결혼식 날 신부 대기실에서 있는 대신 신랑과 함께 식장 입구에서 하객들을 맞이했다. 결혼식 2부에서는 검정 양복 정장을 입은 신랑 옆에 하얀 양복 정장을 입고 나란히 섰다.
이씨는 지난달 3일 국민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그때 당시를 떠올리며 “너무 색다르고 멋있었다는 칭찬을 정말 많이 받았다”면서도 자신의 선택이 대단한 이유를 가지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저 기존의 결혼식 양식에 의문이 많았다고 했다. 이씨는 “지인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면 매번 남자는 밖에 서 있고, 여자는 신부 대기실에 들어가서 앉아 있잖아요. 그 모습을 보면 매번 “‘왜 여자는 신부대기실에 조신하게 앉아있지?’ ‘왜 남자들은 제대로 사진도 못 찍고 인사만 하러 다니지?’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따르지 않았을 뿐이라는 얘기다. 그는 “그 양식에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지키는 것도) 좋지만, 아무 이유 없이 다른 사람들이 다 해서 하는 건 좀 싫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결혼식 2부에서 다들 입는 이브닝드레스 대신 하얀 양복 정장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도 “스튜디오 사진을 찍을 때 정장을 입었더니 너무 잘 어울려서 그냥 선택한 것”이라고 담담히 전했다.
이씨 결혼식의 특별함을 더한 건 부모님들이었다. 결혼식에서 이씨 어머니와 시어머니 모두 한복이 아닌 드레스를 입었고, 양가 부모님들은 각각 손을 맞잡고 동시 입장했다.
이씨는 “결혼식은 다 서양식인데 엄마들만 한복을 입는 게 너무 이상했어요. 옛날에는 여자가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으니 남자만 양복을 입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은데 ‘왜 아직도 이렇게 하고 있지’ 싶었죠”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장이든, 드레스든, 한복이든, 원피스든 자기가 입고 싶은 걸 선택할 수 있으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젊은 사람들뿐 아니라 부모님의 지인들도 이씨의 결혼식에 긍정적이었다. 이씨는 “엄마 지인분들도 ‘이렇게 멋있는 결혼식 처음 본다’ ‘너무 감동 받았다’ 등의 얘기를 많이 해주셨다. 특히 어머님들 드레스가 너무 예뻤다는 얘기가 정말 많았다”고 웃음을 지었다.
“왜 여성 상복은 치마만 되나요?” 양복 입고 조문받은 손녀
지난해 1월 친할아버지를 하늘로 떠나보낸 서모(27·여)씨 가족은 남들 보기에 조금은 다른 듯한 장례식을 치렀다.
상주는 할아버지의 큰아들인 서씨 아버지가 맡았지만, 아버지 바로 옆엔 서씨의 언니가 상주 완장을 차고 함께 섰다. 무엇보다 서씨 본인은 여성들이 입는 한복 치마 상복이 아닌 검정 양복을 입고 서서 조문객을 맞이했다. 통상 가족 중에 남자가 없으면 친구를 불러서라도 남성에게 맡기는 조의금 관리도 서씨가 직접 했다.
사실 서씨가 양복을 선택하게 된 것은 자신에게 맞는 치마 상복이 없었기 때문도 있었다. 그런데도 상복을 대여하는 업체 주인은 처음엔 무조건 양복은 안 된다고 완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서씨는 “당시 사장님은 ‘이 일을 20년간 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여자는 원래 치마를 입는 것’이라며 반대했다”면서 “내가 마지못해 치마를 걸쳐 봤지만 (치수 때문에) 치마가 짧게 올라가는 것을 보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전에 성별 구분 없이 모두 예뻐하며 키우셨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나서야 바지를 받았다”고 전했다.
오히려 조문 온 친지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집성촌에서 계속 살았던 만큼 가부장적인 집안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용 양복을 입은 서씨를 본 어른들은 “요즘엔 이렇게 입어도 된다” “더 든든해 보인다”며 도닥였다. 서씨의 친구들도 “훨씬 편해 보인다” “멋있다” 등의 말로 지지했다.
서씨 형제는 이번 장례식을 경험한 뒤 언젠가 치르게 될 부모님의 장례식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서씨는 “그때는 상주는 큰 언니가, 영정 사진을 드는 건 작은 언니와 제가 맡기로 했다”라고 전했다.
친구들과도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진행하는 ‘성평등한 장례 문화를 위한 제안서’를 함께 작성해 나눠 가졌다. 서씨는 “제 친구들은 이른바 K-장녀(한국의 큰딸)가 많아서 장례에 대해서도 고민들이 많았다. 장례를 치르게 되면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이래야 해’하는 말에 휘둘리지 말고 상주로서 잘 서자고 다짐했다”고 밝혔다.
“다른 선택도 된다는 경험 공유하고파”…예식 절차가 아닌 내용과 의미 봐야
이씨와 서씨는 모두 자신의 예식 후기를 SNS를 통해 공개·공유했다. 어떤 면에서는 매우 개인적인 가족의 이야기를 이처럼 공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서로 모르는 사이인 두 사람은 미리 입이라도 맞춘 듯 ‘하나의 사례’가 되고 싶었다고 각각 말했다. 결혼식과 장례식 모두 개인만의 일이 아닌 가족의 일인 데다 하객이나 조문객을 받는 만큼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인 선택이 아무리 중요해도, 이른바 ‘선례’가 없으면 사회적 통념을 완전히 반하긴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씨도 “래퍼런스(사례)를 제공하고 싶었다”고 했다. “결혼식이라는 게 내 생각만으로 되는 게 아니니까, 다른 분들이 양가 부모님이나 남편을 설득할 때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많이 하더라’ 하면 마음을 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많이 하더라’하는 계기가 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서씨 역시 “우리 가족은 성별과 관계없이 장례를 치르는 게 자연스러운 거로 생각했고, 또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모두) 그러지 않은 것 같더라”면서 “이런 인식을 바꾸려면 일단 가시적으로 많이 보여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서씨의 장례식 후기를 올린 블로그에 ‘말도 안 되는 소리’ 등의 비판 댓글을 다는 이들도 있었다. 서씨는 “그래서 댓글 몇 개는 지운 상태”라면서도 “반대로 ‘내가 상주가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은 못 해봤는데 이제야 이 부분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거나 ‘나도 기회가 된다면 바지 정장을 입겠다’는 분들도 생겼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사람들의 인식은 변하고 있지만, 건전가정의례준칙과 같은 법령은 훨씬 더 뒤떨어져 있다.
현행 건전가전의례준칙을 보면 차례 지내는 곳은 ‘맏손자 집’으로, 장례에서 상주(喪主)는 배우자나 장남이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 결혼식과 관련해서도 신랑이 먼저 입장하고 신부는 그다음에 입장한다고 적혀 있다.
송효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4일 “건전가정의례준칙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실효성이 없어 사실상 사문화됐다”면서도 “준칙상의 가부장적이고 성 불평등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부분들은 혼인과 가족생활에 있어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국가가 보장한다는 헌법 가치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현실적으로 일반 가정에서 준칙을 따르진 않는 만큼 준칙 때문에 가부장적이고 성 불평등한 문화가 조장된다고 보긴 어렵지만, 엄연히 성 불평등한 내용이 현행 규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송 연구위원이 2019년 10월 발간한 ‘가부장적 가정의례 문화의 개선을 위한 정책방안 연구’ 보고서를 보면 당시 조사 결과 성별에 따라 역할을 한정하고 차별하는 장례문화를 개선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이미 84.7%에 달했다.
송 연구위원은 “우리 일상에 깊숙이 남아 있는 가부장적 가족 문화가 구시대적인 법제의 지지 하에 장례에서 소환되고・재연되는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 정책적・제도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예식의 법도와 절차보다 의미 자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는 “가부장적 혈연가족에서 다양한 개인과 가족으로, 의례와 절차 중심의 장례는 추모와 애도가 있는 장례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박성영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