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제17대 한국언론학회장에 당선됐다. 회장 취임 후 ‘언론상’을 제정키로 했다.
당시 전례 없는 언론상 거금을 지원 받은 사연은 이렇다.
회장 당선 후 포항제철 홍보부에 언론상 기금을 요청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서한을 읽은 서울대 법대 출신인 L 포철 이사가 관심을 보이면서 답변을 보내왔다.
“박태준 포철 회장님을 만날 기회를 잠시 드릴테니 원우현 회장님이 최선을 다해 설득해 보면 좋겠습니다. 박 회장님은 누굴 만나면 5분 이상 시간을 갖지 않는 분입니다. 짧은 시간에 원 신임 회장님이 언론상 기획 및 집행 내용과 언론계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나 예산의 규모나 적정성 등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어른의 마음을 움직이실 시간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한 번 만나 용기를 내 보는 게 최선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언론상 기금 모금 설득은 가망이 없었다.
하지만 철강 신화를 이룬 ‘철강왕’ 박태준 포철 회장을 대면할 기회를 갖는다는 것만으로 가슴 벅찬 일이었다.
내심 주님께 기도하면서 결과야 어떻든지 기쁘고 감사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대담을 시작하자 박 회장은 30분이 지나도 자리를 뜨지 않고 관심과 흥미를 보였다.
5분을 셈하면서 밖에서 기다리던 포철 임원들이 뜻밖의 긴 시간에 무슨 영문인지 긴장하며 대기하고 있었다고 후에 얘기를 들었다.
박 회장은 “원 회장님은 언론계가 제구실을 하고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옳은 길 정도로 가려면 어떤 묘안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언론인을 건드리면 더 삐뚤어지는 속성이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언론을 비난하고 계도하려면 반작용만 더 커지는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라고 따지듯이 물었다.
잠시 숨을 고른 나는 평소 언론관을 당당하고 거침없이 쏟아냈다.
“언론학회는 언론 현상을 분석하고 비평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롤 모델을 정해 여론을 유도하고 언론인의 내적 변화를 선도할 수도 있다고 확신합니다. 언론상 기금을 마련해 매년 귀감이 되는 언론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면 합니다. 롤 모델이나 이상형으로 부각시키면서 여론이 칭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언론인의 의식구조와 역할도 서서히 개선되지 않겠습니까. 회장님이나 포철이 원하는대로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언론계도 자정의 불씨, 제 자리로 돌아간다는 희망의 불씨가 살아날 것입니다.”
면담은 예상시간 5분을 훨씬 넘기며 이어졌다.
“포철을 비롯한 대기업이 언론에 직접 지원한다면 경제적 통제로 보일 수 있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회장님. 그 대신 우리 학회에 언론상 기금을 기부하시고 언론 발전 모델을 함께 고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한국 언론의 탈바꿈을 기대해 보시는 게 획기적인 출발점이 될 줄 언론학자로서 저는 믿습니다.
회장님께서 잘 아시다시피 민주국가에서는 언론을 제4부라 칭합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등 선거를 치르는 모든 권력은 언론의 여론 형성 향방에 따라 지대한 영향을 받는 게 사실입니다.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언론이 우선 국가 정체성을 확고히 갖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 회장과의 면담은 나 개인이 아닌, 언론학계를 대표하는 회장으로서 언론학의 기본 상식과 자유민주주의의 원리를 겸손하게 풀어냈다.
물론 내 상식적인 대화로 박 회장이 설득됐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5분을 넘어 30분 이상 기대 밖의 면담의 결과는 대단했다.
박 회장은 당시 기금 1억원을 출연했다.
상금 뿐이 아니었다. 수상자 부부 유럽 여행권을 함께 시상해 당시 포상은 학계 선망의 대상이었다.
심과 결과, 제1회 수상자는 신문분야 김광섭 고바우 김성환, 방송분야 전영우 노정팔 선생을 선정했다.
제2회 때는 서울대 신문대학원 창설과 한국언론학회 부활에 중추적 역할을 한 고 김규환 박사가 받았다.
시상식에 고인의 사모와 아들이 참석했다.
나는 “두 분이 수상하면서 ‘김규환 기념 장학 기금’을 조성한다고 말씀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고인도 기뻐하고 고인의 이름도 학회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라고 즉석에서 제안했다.
좋은 기회라고 반갑게 응답하실 줄 알았다. 하지만 사모는 난색을 표하면서 간곡히 거절하는 표정을 지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귀국해 인사도 못한 터라 김규환 박사의 부고를 접하고 문상을 했다.
빈소를 계속 지켰다. 경북 오상학교 교정에 안장식까지 동행하고 귀경했다.
바쁘게 지내 귀국 후 가르침을 받을 기회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인도 하늘에서 나, 원 교수를 내려보면서
“내가 원 교수 본심을 세상에서는 몰랐네”하고 웃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 뿐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고후 8:21)
정리=유영대 종교기획위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