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장도 “캐디 인권 지켜야”… ‘ESG 실사법’ 앞둔 산업계 초긴장

입력 2023-03-02 17:11 수정 2023-03-02 18:17

충북 진천의 염료 제조업체 A사는 최근 유럽 바이어로부터 “글로벌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평가자료를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수출 거래를 트려면 환경오염이나 사회공헌, 윤리경영 등에 대한 글로벌 기관의 ESG 등급 평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유럽연합(EU)이 내년부터 회원국과 거래하는 기업을 상대로 협력업체까지 ESG 경영을 준수해야 하는 ‘공급망 실사법’(기업 지속가능성 공시 지침)을 시행한다. 그 여파가 한국의 대기업은 물론 중소·중견기업을 덮치고 있다. A사 관계자는 “ESG 평가나 체계 구축과 관련한 노하우가 전혀 없던 터라 당혹스러웠다”고 2일 전했다.

ESG 경영이 세계적 흐름으로 자리를 잡으며 기업들이 ‘태풍’의 영향권에 진입했다. 원청뿐만 아니라 하청업체까지 완제품 생산의 전 과정에서 ESG 경영을 실천해야 한다. 산업계 전반에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특히 인력·자금 여건이 취약한 중소기업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11월부터 중소·중견기업을 대상으로 진행한 ‘ESG 대응 진단·컨설팅’ 설명회에는 3개월간 700여곳이 몰려들 정도였다. ESG 경영 진단에 보통 200만~300만원 정도 든다. 대한상의와 연계해 정부 지원금을 받으면 55만원에 평가를 받고, 일대일 컨설팅도 제공된다. 이에 경기 침체로 허리띠를 졸라매던 기업들 발길이 이어졌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이젠 중소기업도 ESG를 안 하면 경쟁사에 일감을 뺏길 수 있다. 수출기업은 물론이고, 지방 협력업체들에까지 위기의식이 번지고 있다”고 말했다.


ESG 경영은 제조업을 넘어 서비스업에까지 생존의 필수요건으로 자리매김했다. 개인정보 유출이나 갑질 논란, 오너 리스크 사태 등이 경영을 뒤흔드는 요소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어서다. 제주도의 한 골프장은 최근 캐디 인권 보호와 식당 위생관리 같은 ESG 요소를 점검하는 컨설팅을 받았다. 정규직이 아니더라도 근로자 인권이나 환경·위생 문제를 등한시하면, 언제든지 경영 리스크에 직면할 수 있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애견 관련 기관까지 동물 안전사고, 사료 위생관리 등의 ESG 이슈로 상담을 요청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 국가에선 ESG가 소송전으로 비화하고 있다. 생수 에비앙 등을 만드는 글로벌 식음료기업 다농은 최근 환경단체들로부터 하청업체의 ESG 경영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송을 당했다. 프랑스판 공급망 실사법인 ‘경계의 의무법’에 따라 다농은 포장용 플라스틱을 납품하는 하청업체에 대해서도 환경보호 등 ESG 경영 계획을 세울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소송 결과에 따라 EU의 공급망 실사법 시행이 미칠 파장을 가늠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선경 한국ESG연구소 센터장은 “한국은 EU보다 ESG 경영에서 2, 3년 뒤쳐져 있다. 주요국과의 ‘ESG 격차’를 줄일 적극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