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이쪽이요.”
“아니 저쪽에 꽂아놨어.”
대여섯 명의 엄마들이 뛰어다니며 빈자리를 확보했다.
두 명의 아줌마가 던진 가방이 공교롭게도 두 남녀가 스킨십에 열을 올리는 그 옆자리에 박혔다. 난 가슴이 철렁했다. 어른들의 눈길에 의식도 않는데 펑퍼짐한 가방이 면상을 때릴까 봐 놀란 것이다. 바로 옆자리인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두 남녀는, 더 짙은 표현으로, 아예 포개져 앉았다.
곁에서 헛기침하며 “형님! 난 저녁을 괜히 먹었어요. 청심환을 먹어야지 자식 생각에 절약한다고 전철 타면 속에서 불이 나요.”
“암만해도 저들 여기 길게 눕겠다.”
“아이코 신경 접어요.”
“젊은 애들에게 배우자 숙박비가 천원이니 얼마나 싸니, 관광객도 많은 데서 쇼를 해보자.”
아무래도 소주 한 잔씩 걸친 아줌마들의 입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말이 전철 속 승객들에게는 흥미진진한 모양이었다.
그 청년은 어리둥절하며 혹시 제 어머니 친구들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겠지, 남자 친구의 목덜미까지 내리덮은 긴 머리의 아가씨는 주책바가지 아줌마들이라고 비웃는 눈빛이었다. ‘뜨거운 사랑을 해봤어야 사랑의 맛을 알지’하는 얄궂은 눈짓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부부가 모처럼 손잡고 환갑여행 갔다가 돌아올 때는 각각 다른 비행기를 타고 들어오는 세대인데 냉랭하게 메말라버린 70대의 감정으로 20대의 물불 못 가리는 정열적인 사랑을 이해하겠는가 말이다. 가방 던지는 아줌마들이 우르르 내리면서 내 자리까지 챙겨주었다.
나도 강북까지 가는 길이였다. 엉거주춤하고 서 있다가 노약자석에 자리하나가 비어있어 앉았다. 잠시 후 아저씨 한 분이 앞에서 내려다보더니 불만스러운 어조로 “학생 그러고 앉아있으면 마음이 편하냐?”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 옆에 여학생이 너무 놀랐는지 쏜살같이 뛰어나겠다.
“저 아저씨 요즘 학생들이 어른들보다 더 피곤하답니다.”
“학생 많이 피곤하다는 어른들의 따듯한 위로가 필요한 시대랍니다.”
일어서려는데 옆에 어머니 한 분이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눈짓을 했다. 함께 그냥 앉아 있자는 것이다.
잠시 후 그 아저씨 염치도 없고 미안했는지 도망치듯이 전철에서 후다닥 내렸다. 옆자리의 아줌마는 내게 말을 걸었다.
“늙으면 왜 저럴까요? 우리 집 남자도 똑같아요. 어쩌다 휴일에 아이들이 집에 있으면 너 어제 종일 뭐하고 돌아다녔니?”하며 볼멘소리를 하였다.
애들은 아빠 말에 가타부타 대꾸도 없이 곁에서 자리를 옮기고 그 시간부터 대화는 잠식하고 만다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 오가는 대화가 시작부터 공격적이라고 그 아줌마는 사는 것이 괴롭다는 하소연을 한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방금 그분도 집에서 다투고 나온 것 같아요.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아버지들이 지쳐 있어요. 대부분 남자가 굳은 표정에 유머가 전혀 없어요. 그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이라는 긍정적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이 몇이냐고 물었다. 서로 자녀 얘기와 남편의 성격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오래 사귄 사이처럼 친근해졌다.
“제가 말씀 좀 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해주세요. 가정의 평화를 되찾으려면 날 잡고 미루지 말고 혁명을 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먼저 결심하고 자녀들에게 선포하십시오 .”
“어떻게요?”
일단 아들딸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너희 엄마는 오늘 이 시간부터 아빠에 대한 불평불만이나 원망의 말, 너희 아빠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를 너희들 앞에서 절대 하지 않겠다. 너희도 내게 아버지에 대한 허점이나 불만을 오늘부터 하지 말거라.”
어제 종일 우리 가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먼저 자녀들에게 말하겠다고 내 손을 꼭 잡으며 약속했다.
또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있는 아버지, 청춘을 바쳐 우릴 위해 헌신한 수고를 인정하고 감사하기로 했다. 우리 집안에 냉기가 꽉 찬 것은 모두 이 엄마 탓이다. 자식들과 맞장구치며 남편 단점 얘기하는 집은 망한 다더라 이 엄마 맘을 고쳐 살기로 했다.”
“자식들 앞에서 남편을 비난하고 험담하면 집안 무너집니다. 이스라엘 탈무드교육지침에 ‘율법적으로는 부모에게 불효한 자 돌로 쳐 죽이라’ 했습니다. 각 가정의 고질적 병 교회 50년 출석해도 못 고칩니다. 가정의 평화는 어머니의 책임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진 가정, 그 유전자는 손자들에게도 그대로 흘러가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런 말도 했다.
“아버지가 왕따 당한 가정 나중엔 어머니도 무시하고 괄시합니다. 아무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아픔을 지고 사는 아버지들의 삶, 그것은 나라의 중추 신경이 무너져 내리는 일입니다. 우리 사회 대부분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기울어 남편과 소중한 시간을 놓쳐버리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저는 저의 일터에서 수많은 간접 경험을 하여 왔습니다. 때론 내가 그 주인공이 된 듯이 가슴 아픈 경험도 수차례 해왔습니다.”
마땅히 자식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할 노후생활이 오히려 비애를 느끼며 살아가는 어머니들의 가슴 아픈 얘기를 많이 들었다. 지나친 자식 사랑에 눈이 어두워 미래의 삶을 예측 못 했던 어리석음이었다는 안타까운 고백들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반듯한 가정교육을 받은 자녀들이 부모의 눈물과 피땀을 가슴 절절히 느끼며 효성을 다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는 참으로 가슴 뿌듯한 순간들도 많았다. 우리 삶의 행복을 위해 가정의 중심 가장 소중한 자리에 가장인 아버지가 굳건히 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남자를 먼저 지으신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중차대한 사명을 남자의 갈비 뼛속에 새겨 넣으시듯 여자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남자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의 몸처럼 하라 하셨다. 반면에 여자에게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언급은 반듯한 질서 위에 가정을 세우시려는 뜻으로 순종을 명하신 것이다. 여성 상류사회가 제아무리 천정부지로 치솟은들 진리가 변하며 하나님의 명령이 뒤바뀌겠는가,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십계명의 근엄한 명령을 주셨다. 앞뒤에 수식어가 없는 명령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일반 사회에서도 효자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대인처럼 불효자에게 즉각적인 징계를 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든든히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절절히 배여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을 어떤 가치 기준으로 양육해야 하는가. 먼저 떠나야 하는 부모의 미래가 아닌 자녀들 미래의 형통을 위하여 명령하신 계명인 것이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라 네가 땅에서 잘 되고 장수 하리라.” 아멘, 이보다 더 큰 축복을 어떤 일을 통해서 얻을 수 있겠는가, 간단명료한 이 말씀, 부모를 공경하라 하심은 전적으로 사람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자애로우심이다. 지구상에 모든 피조물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길 바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나는 그날 전철에서 만난 그분에게 자식들에게 가정에 규범을 다시 고쳐 결단하고 선포할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당부했다. 아마도 그날 그녀의 집에 평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음날의 태양은 그 댁을 위해 떠오를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지금도 그분의 집안에서 다복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내 귀에 들려오는 것 같다.
<아름다운 절약정신>
주루룩 풀리는 두루마리
단번에 두툼하게 잡힌다
노래처럼 귓가 맴도는
아버지의 절약정신
휴지는 3면 치약은 2㎜
세숫물은 세 번 돌려쓴다
걸레를 빨고 화초를 적시고
우물물이 가득히 고여 있음에도
하나님의 계명인 듯 순종했다.
어쩌다 더 잡힌 휴지는
반드시 다시 돌려놓았다.
분명 엄동설한인데
무지갯빛 풍성한 청과물 전시장
수억대의 수려한 관상수
산소공급기가 수두룩하다
우리는 어떤 수고를 하였는가,
받아 누리기에 송구함은 없는가,
백번 곱씹어도 떨리는 감동
황금보다 현금보다 소중한 지금
우리들 인생 최상이 오늘이다
두 손등 적시는 감격의 눈물
절약의 대명사 아버지 덕분에
나는 늘 재벌이 된 듯
왕비가 된 듯 어깨를 펴 본다
◇김국에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정리=
전병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