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의 신작 ‘정년이’는 개막 전부터 여러모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오는 17~29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오르는 이 작품은 웹툰의 첫 창극화라는 기록을 쓰게 됐다. 지난 10년간 판소리뿐만 아니라 현대 소설과 희곡, 그리스 비극, 중국 경극 등 소재를 확장하며 창극의 대중화를 이끌었던 국립창극단은 이번에 K-콘텐츠의 중심인 웹툰까지 아우르며 창극의 스펙트럼을 넓힐 예정이다.
또한, 국립창극단 ‘정년이’는 캐스팅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티켓이 조기 매진되는 바람에 3회 공연을 추가했지만 이마저 바로 매진된 상황이다. 국립극장은 공연 홍보 대신 빗발치는 티켓 구입 문의에 대응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이런 뜨거운 반응은 1950년대 여성국극단을 배경으로 목포 소녀 윤정년과 동료 단원들의 성장기를 그린 동명 웹툰이 여성 서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젊은 세대의 높은 지지를 받은 것과 관련 있다.
게다가 ‘정년이’는 창극의 한 갈래지만 지금은 사실상 명맥이 끊긴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여성 소리꾼들이 남성 중심의 국악계에 반발해 1948년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면서 태동한 여성국극은 1950년대 전성기를 맞이했다. 특히 남역(男役) 배우들은 요즘 사생팬을 거느린 아이돌 가수 같은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영화와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빠르게 쇠퇴한 여성국극은 1960년대 전통문화 보존정책에 따른 지원 대상에서도 배제됐다. 1962년 설립된 국립창극단의 전신 국립국극단도 남녀 혼성창극만을 인정했다.
국립창극단 ‘정년이’는 웹툰 속에서 그림으로만 존재하던 소리, 춤, 연기를 무대 위 창극으로 확장함으로써 원작의 매력을 입체적으로 구현할 예정이다. 제작진 면면도 쟁쟁하다. 창작 판소리극 ‘사천가’ ‘억척가’로 호흡을 맞춘 남인우 연출가와 이자람 작창·음악감독 그리고 지난해 제16회 차범석희곡상을 수상한 김민정 작가가 참여했다. 20대~50대 국립창극단 여성 단원들이 총출동한 가운데 주인공 윤정년 역으로 출연하는 조유아(36)를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만나 이번 작품에 대한 소회를 들어봤다.
국립창극단 입단 이후 신스틸러로 주목
“제가 정년이로 캐스팅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저는 평소 주인공보다는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는 감초 역할이 더 맞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정년이의 노래 선생님 패트리샤 역으로 오디션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남인우 연출님이 정년이의 대사를 읽어보라고 시키시더니 저를 이소연 언니와 함께 더블 캐스팅하셨어요.”
2016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조유아는 진도의 소리꾼 집안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전남 무형문화재 제40호 조도닻배놀이 예능보유자 조오환 명인이며, 증조할아버지부터 그까지 4대째 이어져 온 엿타령은 지난해 진도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어릴 때부터 국악 신동으로 소문난 그는 2010년 임방울 국악제와 2012년 남도민요전국경창대회 대상을 석권한 실력파다. 2015년 국립창극단 정식 입단 전인 인턴 시절에 재일교포 극작가 겸 연출가 정의신이 쓰고 연출한 창극 ‘코카서스의 백묵원’의 여주인공 그루셰로 발탁되기도 했다. 입단 이후에는 주로 창극 ‘춘향’의 향단이나 ‘흥보씨’의 외계인 그리고 마당놀이 ‘심청이 온다’의 뺑덕과 ‘놀보가 온다’의 놀보처 등 개성 있는 조연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코카서스의 백묵원’ 오디션 볼 때도 극 중 사투리를 많이 쓰는 시골 아낙 역할을 준비했어요. 인턴이기 때문에 비중 있는 역할은 생각조차 안 했죠. 그런데, 정의신 선생님이 제 전라도 사투리 연기를 보고 순박한 소녀 그루셰에 어울리신다고 생각하셨대요. 이번 오디션에서도 제 사투리 연기가 목포 출신의 씩씩한 정년이랑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무대에 오를 때마다 많이 떠는 편인데, ‘코카서스의 백묵원’ 때보다 부담이 더 큰 이번 ‘정년이’ 공연에서 정말 많이 떨까 봐 걱정이에요.”
천연덕스러운 연기로 국립창극단의 신스틸러가 된 그가 무대에서 늘 떤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주로 감초 역할로 무대에서 까부는 연기를 하니까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다. 정적인 역할을 연기할 때는 떠는 모습이 친구에게 들키기도 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부담에도 불구하고 정년이는 그가 그동안 맡았던 역할들 가운데 가장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다가온다. 그만큼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도 클 수밖에 없다.
"이번 작품 통해 섬세한 연기도 보여주고파"
“‘정년이’가 기본적으로 소리꾼 이야기인 만큼 이번 작품에 참여하는 단원들 모두 자신의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개인적으로 정년이에게 이입되는 요소가 많은데요. 진도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학교에 다닌 저와 고향도 같지만, 무엇보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공부한 게 비슷해요. 정년이는 명창이었던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공부하고 여성국극 배우가 되기 위해 서울로 가잖아요. 저 역시 아빠가 ‘소리 하면 힘들게 산다’며 무척 반대하셨지만, 제가 끝까지 고집부린 덕분에 소리 공부를 이어가며 창극에 대한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또 정년이가 목이 꺾여서(상해서) 고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 역시 목이 잘 쉬고 붓는 편인 데다 소리가 매우 허스키해서 그 심정을 잘 압니다.”
또 다른 정년이 이소연(39)은 2013년 입단 이후 창극 ‘춘향’의 춘향과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옹녀, ‘명색이 아프레걸’의 박남옥 등 여러 작품에서 주역을 맡는 등 국립창극단 간판스타로 꼽힌다. 담백하면서도 맑은 성음을 지닌 이소연은 뮤지컬 ‘아리랑’의 옥비와 ‘서편제’의 송화 역으로 출연해 호평 받기도 했다. 흔히 같은 역에 함께 캐스팅된 배우들은 서로 경쟁하기 마련이지만 조유아는 이소연이야말로 ‘최고의 스승’으로 치켜세웠다.
“주역 경험도 많고 연기도 잘하는 언니랑 더블 캐스팅돼서 부담스럽지만 정말 많이 배우고 있어요. 제가 그동안 무대에서 혼자 막 연기하는 역할이 많다보니 상대방의 대사를 들으며 그에 맞는 리액션을 하는 역할을 많이 못했어요. 그래서 감정적으로 섬세한 언니의 연기를 보는 게 도움이 됩니다. 동경해오던 소연 언니가 제게 ‘너는 정년이가 딱이다’라고 격려해 줘서 정말 기뻤습니다.”
조유아는 트로트 가수 송가인의 절친으로 TV 예능 프로그램에 몇 차례 출연한 적 있다. 그때마다 남다른 유머 감각과 소리로 시청자의 시선을 끈 덕분에 한동안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를 권유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창극만큼 좋아하는 것은 없다며 모두 거절했다. “극 중 정년의 대사 중에 ‘무대를 마치고 박수 소리를 들으면 컴컴해서 뵈지도 않던 관중석이 다 보이고, 눈앞이 훤해지고, 세상 만물이 내 안으로 들어옵디다’라는 말이 있다. 창극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받는 감동만큼 나를 움직이는 것은 없다”는 게 조유아의 설명이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