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햇볕이 창을 통해 들어온다. 햇빛은 보이지 않지만 따뜻한 기운은 느낄 수 있다. 작업 중인 캔버스 곳곳에 옷핀과 가느다란 실, 나무껍질 등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작가는 낯선 길을 찾아가듯 조심스레 손끝 감각으로 느릿느릿 색을 덧칠한다. 전맹 시각장애인 박환(65) 화가의 춘천작업실 풍경이다.
그는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다섯 차례 입선하고 한국국제아트페어에 초청받는 등 촉망받는 작가였지만, 2013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절망에 빠진 작가를 일으켜 세운 건 그림이었다. 시각장애도 그의 예술혼을 없애지 못했다. 박 작가는 연필 대신 실, 구슬핀을 들었다. 피나는 노력 끝에 나무껍질, 모래 등 각종 재료로 스케치해서 위치, 방향, 두께, 색채 등을 표시한 뒤 물감을 덧입힌다. 세상을 다시 보고 싶다는 간절함을 담아 자기만의 방식으로 마음속 세상을 그려낸다.
그의 첫 전시회를 찾은 한 관람객은 “사업으로 재산을 다 잃고 극단적 선택까지 생각했는데 박 작가의 작품을 보고 삶을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박 작가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하나의 희망이라도 남기고 싶다”며 그림을 계속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시각장애인 예술가들은 작품 활동을 하는 데 걸림돌이 많다. MZ세대 청년 6명이 이들을 돕기 위해 에이블라인드(ablind)라는 기업을 만들었다. ‘할 수 있다’는 뜻의 에이블(able)에 ‘시각장애인’을 나타내는 블라인드(blind)를 합쳐 만든 이름으로 장애라는 편견을 걷어내고 순수한 작품세계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들의 주된 활동은 시각장애 예술인과 함께하는 아트 콜라보레이션, 제품 제작 및 판매, 배리어프리(barrier free) 지향 전시회, 크라우드펀딩 등을 통해 장애 예술가들의 사회적·경제적 자립을 돕는 것이다.
에이블라인드는 지난해 4월 시각장애인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함께 봄’ 전시회를 진행했고, 올 2월에는 서울 을지로 SKT타워에서 SK텔레콤과 함께 ‘손으로 보는 감각, 손끝으로 전하는 희망’이라는 미디어아트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행운을 전해주는 클로버 토끼’ 작품을 전시한 허은빈 작가는 중학생 눈의 망막이 떨어져 나가는 망막박리를 앓은 후 시력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좋아하던 미술을 그만뒀다. 문학을 선택해 대학에 진학했지만 미술에 대한 아쉬움을 떨칠 수 없어 조형학을 공부하며 다시 미술을 시작했다. 허 작가는 “비장애인에 비해 시야가 매우 좁지만 사물을 한 번 볼 때 정말 자세히 보고 섬세히 표현” 한다며 “일러스트레이터, 원단 디자이너. 그리고 에이블라인드의 디자이너까지 저만의 자유로운 선을 그으며 많은 꿈을 이루고 있다”며 자신이 디자인한 텀블러를 들고 활짝 웃었다.
양드림 대표는 “편견과 차별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창업했다”며 “특히 시각장애인의 어려움과 고통에 공감한다. 그들이 재미있게 예술 활동을 할 기반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당찬 포부를 드러냈다.
서영희 기자 finalcut0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