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학총장협의회(IAUP)가 1974년 미국 보스턴 캔모어 광장 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1965년 이 협의회를 창립하신 경희대 조영식 총장이 개회사를 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다음 기조연설자는 누구를 청빙하는 지 궁금했다.
당시 내가 협의회의 보스턴 현장을 총괄하는 신임 교수로 선발대로 파견돼 모든 심부름을 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유학생으로 보스턴에서 대학원 시절을 보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학생이었다. 한국에서의 재정조달이 전무한 열악한 조건이었다.
때문에 학교 캠퍼스와 일자리 외에 보스턴 전반에 관심을 가질 여유라곤 거의 없었다.
그런데 본부 조영식 총장과 윤세원 부총장이 기조 연설자는 노벨상 수상자를 수소문해 초빙하고, 또 축사는 저명대학 총장으로 모시라는 팩스를 보내왔다.
아뿔싸. 순간 난감했다.
우선 누가 보스턴 지역에 노벨상 수상자인가 확인했다.
탐색해 보니 하버드 대 경제학과 케네스 애로 교수가 있었다.
축사는 보스턴 대 총장 존 실버 박사가 적임자로 떠올랐다.
며칠 뒤 하버드 대 경제학과 애로 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노벨상 수상 교수는 생면부지의 동양 청년 교수가 느닷없이 찾아와 당황하는 눈치였다.
IAUP는 각국의 대학 총장들이 고등교육 발전을 위해 협력하는 단체인데,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논지를 피력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교육학자들에게 부탁하는 게 순리에 맞지 않는가 반문하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영어도 그리 잘 하지 못하는 젊은 학자가 우겨대니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세계대학의 미래를 전망하는 대회는 많습니다. 그러나 이미 참석한 총장들과 교육행정가들의 경험이나 교육자로서의 견해는 이미 같은 주제로 여러 번 다뤘습니다. 때문에 보스턴 대회는 색다른 사회과학의 조명을 필요로 합니다. 바로 교수님 같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기조 연설자로 모시어 ‘경제적 관점에서 본 세계대학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경청할 기회가 있다면 의미 있는 행사가 될 것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결국 노 교수는 내 논지가 타당하다고 생각했는지 칭찬하면서 기조 연설을 승낙했다.
상대방 지위와 상관 없이 대화의 타당성에만 집중하던 대학자의 인품이 감동이었다.
종신교수 100여명을 퇴직시키며 보스턴 대를 혁신한 존 실버 총장도 교육개혁을 강연키로 했다.
이런 내용을 상세히 적어 경희대 본부에 팩스로 보냈다.
대학 본부 조영식 회장, 윤세영 이원설 위원 등의 칭찬과 격려가 쇄도했다.
그야말로 가슴이 벅찬 날이었다.
기대하던 IAUP 세계대학총장협의회 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개회사가 끝나가는 데도 애로 교수가 나타나질 않는 게 아닌가.
그 어려운 난제를 어찌 그리 쉽게 풀어낼 수 있나 기대 반 회의 반 했던 이들은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물었다.
순서를 바꿔 존 실버 총장의 축사를 먼저 들었다.
잠시 후, 양 손에 책을 든 노(老) 교수가 헐레벌떡 회의장으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노 교수는 독립기념일 퍼레이드 때문에 길이 막혔고 자가 운전으로 여유 있게 오다 늦었다고 정중히 사과했다.
그리고 멋진 기조연설을 하니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검소하고 겸손한 미국 학자들의 일상을 체험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후 내 교수 생활에도 큰 교훈을 얻었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 15:23)
정리=유영대 종교기획위원 ydyoo@kmib.co.kr